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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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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 뿌리’ 흔든 교육개혁

조선일보 [시론2.24]

한참 전의 일이지만 서울대에 계시는 선배 교수가 농담으로 한 말이 생각난다. 학생이 선생 공부시키지 선생이 학생 공부시키냐? 뼈있는 농담이 있듯이 지금 돌이켜 보면 이 말에는 여러 가지 뜻이 들어있는 것 같다.

과거에는 그만큼 서울대의 학생들이 우수했으며 이들에게 창피당하지 않기 위해서도 교수는 공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울대는 사실상 우수한 학생들이 만든 대학이며 교수는 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러한 서울대가 최근 추락하고 있다.

얼마 전에 나는 선배 교수의 부름을 받고 서울대에 출강하는 영광을 얻었다. 오직 창피당하지 않기 위해서 나는 여름방학 내내 강의 준비를 하였고 대망의 강의 첫날에는 긴장하여 식은 땀이 날 정도였다. 그러나 한 학기가 끝나고 학생들의 답안지를 받아든 나는 실망을 금치 못할 정도가 아니라 절망에 빠졌으며 지금도 완전히 여기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기초 학문을 익혀 그 분야 학자의 길로 나아가려면 반드시 들어야 하는 과목들이 ‘인기가 없다’는 이유로 속절없이 폐강되고 사회 진출에 유리하다는 과목은 학생들이 미어터지고 있었다.

그 전부터도 ‘오늘의 서울대는 옛 서울대가 아니다’는 얘기는 익히 들어온 터였다. ‘서울대가 고시학원으로 변했다’거나 ‘과 연구실에서 학생들이 전공은 제쳐놓고 법전 공부를 하고 있다’ ‘우열반을 만들어야 한다’라는 말은 새삼스런 얘기도 아니다.

하지만 ‘그래도 서울대인데’라는 기대까지 저버릴 수는 없었다. 사실 고시 열풍은 예전에도 있었다. 고등고시든 그 이후 제도가 바뀐 사법시험이든 우리 나라에서 가장 많은 판·검사와 변호사를 배출한 것이 서울대 아닌가.

고시만 그랬던 것도 아니다. 사회 참여에 있어서도 서울대는 국내 최고였다. 요즈음 민주화 인사를 자처하며 매스컴을 타는 얼굴들도 ‘서울대 출신’들 아닌가. 문제는 고시 열풍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학문의 길로 들어선 학생들의 눈빛에서 탐구와 연마의 기운을 느낄 수 없었다는 데에 있었다. 서울대가 국내 최고 수준의 학생들이 갈 수 있는 대학이란 점에 동의한다면 그들 앞에 서는 교수에게 두려움을 주어야 하는데 이는커녕 집에서 관악산 캠퍼스까지 왕복 3시간 품값이 아까운 생각이 들도록 하는 사실이다.

왜 이렇게 됐을까. 가장 큰 원인은 학생들 스스로로부터 찾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서울대생들로 하여금 전공과목보다는 법전을 외우지 않으면 안 되도록 한 사회와 대학 분위기는 과연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오히려 우리 기성세대들이 학생들을 그곳으로 몰고간 측면이 더 크다.

섣부른 개혁이 학문의 근본을 흔들고 있는 것이다. 시대가 변하면 학문도 변하고 교육의 내용도 바뀌어야 함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학문에는 나무처럼 잎과 가지가 있고 줄기가 있으며 또한 뿌리가 있다. 최근 개혁의 방향은 지나치게 외형적이고 가시적인 성과에만 치중하여 자칫하면 뿌리가 부실한 나무처럼 어느 순간 학문과 교육 자체가 흔들리는 위험에 당면할 수 있다.

여론에서 모범으로 삼는 선진국의 교육과 학문의 현실은 대지에 튼튼히 뿌리박은 나무와 같다. 뿌리가 튼튼하니까 기능적·응용적 분야도 더욱 발달하는 것이다. 축구를 보면 선수의 기본기가 부족한데 외국감독을 임명해 봐야 성과가 없는 것이나 같은 이치이다. 내가 목도하고 절망한 서울대의 현실은 이미 심각한 단계에 접어들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공부하는 학생이 없는 서울대는 더 이상 서울대가 아니다.

( 李範鶴 / 국민대 교수·동양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