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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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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조카의 나라

조선일보 태평로 컬럼

전 예금보험공사 전무 이형택씨는 국무총리 급은 되는 것 같다. 어쩌면 그 이상이어야 한다. 그가 만난 사람들을 보면 그렇다. 이씨는 해군 참모총장과 정보작전참모부장을 잇달아 집무실로 찾아가 만나 보물발굴 사업에 군(軍) 장비지원을 요청했다.

이씨가 해군 참모총장을 만나는 자리에는 육군 소장 계급의 국가정보원장 국방보좌관이 ‘사실상 수행’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씨는 청와대 경제수석에게 누구 누구를 소개해 달라고 했는가 하면 국가정보원 차장을 거리낌 없이 만나 역시 같은 부탁을 해 실행에 옮기도록 했다.

일반인이라면 접근은커녕 연락할 엄두조차 내기 어려운 사람들이다. 육·해·공 3군 통합 사령부가 자리잡고 있는 계룡대나 국가정보원은 일반인들은 접근 자체가 불가능한 곳이다. 그런 곳을 이처럼 손쉽게, 그리고 스스럼 없이 드나들고 일을 부탁할 정도라면 우리나라에 대통령이나 총리 말고 누가 또 있을까. 어쩌면 그런 직위에 있다고 해도 ‘자리를 걸지 않는 한’ 자신의 개인적인 일을 이처럼 대담하고 거리낌 없이 부탁할 엄두는 내지 못했을 것이다.

이씨는 생각하는 것도 국정 최고 지도자 급은 되는 것 같다. 이씨를 만난 사람들은 그가 ‘보물이 발굴되면 국익에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고 전한다. 역사의 뒤안에 숨어 있는 사실을 찾아내 나라에 도움을 주기 위해 이처럼 몸 돌보지 않고 뛰어다니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높은 자리에 임명해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더구나 이씨는 이런 일을 하고 다니면서 ‘내 고모부가 누구’라거나 ‘내가 누구의 처조카’라고 적극적으로 밝히지도 않았다고 한다. 이씨를 만난 사람들의 주장에 따르면 그렇다. 우스갯소리도 이쯤 되면 기네스북 등재감은 충분히 되고도 남을 듯하다.

업무 추진력에 있어서 이씨의 힘은 강력하기가 비할 곳 없다. 그가 한마디 하자 국가 정보기관이 움직였다. 사람만 움직인 것이 아니다. 해경은 장비와 특수요원을 동원해 이씨가 보물이 있는 것 같다고 지목한 섬의 동굴을 탐사했다. 나라 예산까지 사용한 것이다. 우리 현실에서 장관이라고 해도 이렇게 여러 기관을 한꺼번에 동원하고 일사불란하게 일이 굴러가도록 할 수는 없다.

사람들은 이씨를 부르는데 “소통령으로는 부족하고 중통령(中統領) 정도는 돼야한다”고 수근댄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상식인들은 안다. 정부 산하 기관 전무에 불과한 사람의 한마디에 왜, 어떻게 국가 기관이 총동원됐으며, 관계자들이 어떤 거짓말을 왜 하고 있는지 추론하는 데 고등수학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부터가 ‘거짓’인지를 가려내는 것이 어려운 일도 아니다.

그런데도 관련자들은 앞뒤가 맞지 않는 궤변으로 국민을 피곤하고 짜증나게 하고 있다. ‘일면식도 없다’고 했던 참모총장은 2~3일도 안돼 ‘만나기는 했지만 부탁한 일을 거절했다’고 말을 바꾼다. 오전까지 “누군가 나를 모함하기 위해 이씨와 관련 짓는다”고 펄펄뛰던 청와대 경제수석이 같은 날 오후가 되자 “사실은 내가 국정원 차장에게 소개했다”고 뒤집는다.

그러니 그가 소개한 사람이 국정원 차장보다 높은 사람이란 게 드러난다고 해서 놀랄 사람도 없을 것이다. 하긴 그 스스로 그날 오전 “내가 전화를 한다면 국정원장에게 하지 무엇하러 잘 알지도 못하는 차장에게 하겠느냐”고 하긴 했었다.

납세자이자 투표권자인 국민들은 알 권리가 있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예금보험공사 전무의 한마디에 국가 기관이 움직였으며 말썽이 생기자 고위 공직자들이 아침 저녁으로 말을 바꾸는 ‘망신’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를 감싸고 보호해야 하는지 알 권리가 있다. 혹시라도 사건이 ‘이씨의 고모나 고모부’로 비화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라면 어리석은 판단이다. 그런 생각이야말로 ‘국민’을 지나치게 낮추어 보는 오만한 발상일 뿐이다.

( 김효재 편집부국장 hjkim@chosun.com )

2002. 1.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