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5

View Articles

Name


	지만원

Subject

한국은 왜 정전 협정과 평화 협정에서 열외되고 있나(32)

미국은 명분과 실리 없이 한반도 전쟁에 말려들까 봐 매우 고심해 왔다. 제3공화국 시절에는 전방에서 심심치 않게 무력 충돌이 있었다. 북측이 소총을 쏘면 우리측은 기관총을 쏘았고, 북측이 기관총을 쏘면 우리측은 대포를 쏘았다. 이럴 때마다 가장 긴장하는 쪽은 주한 미군이었다. 성질 급하고 오기가 넘치는 남북한 군인들이 서로 감정 싸움을 하다보면 우습게 전쟁이 발발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미국은 이렇다 할 명분 없이 전쟁에 휘말리게 되기 때문이었다.

주한 미군의 기본 임무는 한반도에서 전쟁을 억제하는 것이다. 미국은 전쟁이 남한에 의해서도 도발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남한이 미국의 힘을 믿고 북한을 공격할까 봐 남한은 장거리 대구경 유도탄을 개발하지 못하게 했다. 미군의 핵무기가 배치돼 있던 유럽의 모든 나라들과는 핵무기 공동관리를 위한 쌍무 협정이 체결됐었다. 그러나 전술 핵무기가 다량 배치됐던 한국에게는 핵무기 공동 관리권을 주지 않았다. 감정이 격화되면 언제라도 한국군이 그들로부터 핵
무기를 빼앗아다가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북한이 정전위 기능을 마비시키고, 북한측 중립국 감시 위원단을 추방했다. 이로써 휴전선에서 돌발적인 충돌이 발생해도 이를 따질 수 있는 대화 통로가 없어져 버린 것이다. 북한과의 대화 창구가 없다는 것은 미국 입장으로서는 매우 불안한 것이다. 지난번 미국 헬기가 북한을 넘어갔을 때에도 대화 창구가 없었기 때문에 북-미간의 정치 협상에 의해 홀준위를 데려올 수밖에 없었다.

미국의 이러한 약점을 잘 알고 있는 북한군은 의도적으로 휴전선에서 돌출적인 시위를 해보이고 있다. 이는 자칫 남북한 장병들 간의 신경전으로 비화될 수 있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이를 조금도 좌시할 수 없다. 8군 사령관이 서둘러 북한과 대화 통로를 마련하고 싶어하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다.

이렇게 대화 창구가 없어져 버린 것이 순전히 북한만의 탓인가. 매우 유감스럽게도 한국 정부의 탓이 더 많다. 한국 정부가 북한에게 구실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는 자존심을 회복한다는 명분하에 1991년 1월 한국군 소장을 UNC측 정전위 수석 대표로 임명하여 판문점으로 내보냈다. 그러나 북한에게 있어 한국군은 휴전 협정 당사자가 아니다. 실질적으로는 한국이 휴전 협정의 당사자이지만 법적으로는 그렇지 않다.

정확히 말하면 한국군 장군을 정전위 수석 대표로 임명하여 판문점으로 내보낸 것은 일종의 커닝이었다. 북한이 이를 트집 잡지 않고 적당히 눈 감아 주리라고 생각했다면 한국정부는 북한을 몰라도 너무나 모르는 것이었다. 따라서 정전위 무력화에 원인을 제공한 자는 바로 한국 정부였다.

지금 휴전선에 북한의 공격 무기가 집결돼 있다. 미국으로서는 어떻게든 북한과 대화를 해야 할 때이다. 이렇게 어려운 시기에 북한이 미국과 대화 창구를 트자고 제안하면 미국으로서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북한 군과의 대화 통로를 다시 트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미군 장군이 다시 나서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대화의 통로가 정전위가 되느냐 또는 북-미 군사 회담이 되느냐는 아직은 변수다. 그러나 칼자루는 북한이 쥐고 있다.

설사 미군 장군을 수석 대표로 다시 임명해서 정전위 기능을 회복시킨다 해도 한국의 체면은 과거보다 더 많이 손상된다. ‘역시 한국은 북한의 상대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준 결과만 되는 것이다.

주한 미군은 3만7천명에 불과하다. 한국군은 70만이다. 70만 한국군이 3만7천 미국에게 작전권을 맡겨 놓고 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우리 70만 대군에는 완전한 억지력이 없기 때문이고 또 다른 하나는 우리 군에 정보 작전 능력이 갖춰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북한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주체성의 상실이요, 민족의 수치일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북한만이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가 다 아는 일이다. 한국군 제복은 미국군 제복과 똑같다. 미국에 가서 한국군의 제복을 입으면 다른 나라 군인들이 한국군을 미군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마당에 그까짓 수석 대표 한 자리를 한국군 소장으로 대치한다 해서 한국의 위상이 올라가겠는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것과 다름없다.

당시의 여론에도 문제가 많았다. 한국군 장군을 UNC측 수석 대표로 임명했다는 사실을 당시의 여론들은 얼마나 높이 평가했었는가. 정부는 전문성을 가져야 한다. 여론에 의해 전문 분야에 대한 정책을 결정한다는 것은 이렇듯 위험한 것이다. 결국 아마추어식 정책은 영리한 북한에게 정전위를 무효화 시킬 수 있는 명분을 주었고, 이는 다시 그들의 소원인 ‘북미 군사회담’이라는 직접 통로를 개설하는 데 아스파트까지 깔아주는 꼴이 됐다.

전쟁을 꺼려하는 미국은 어떤 형태로든 북한과 대화 창구를 운영해야 할 입장에 처해 있다. 홀 준위에 대한 전례도 있고, 옛날 포로 교환시에도 북미간 직접 대화가 가동된 적이 있었다. 북한이 북미 군사회담을 끝까지 고집한다면 실용주의에 젖어온 미국은 정전위의 회복을 끝까지 주장하는 한국을 귀찮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최근 북한이 취한 일련의 조치들은 치밀하게 계획된 하나의 오케스트라였다. 정전위 무효화 선언, 중립국 감시 위원단 해체, 전방에서의 돌출적인 시위, 간첩 남파, 휴전선에의 공격 무기 추진 행위 등은 한국과 미국의 정곡을 찌른 작품이었다.

평화협정문제가 한층 더 강도 높게 대두되고 있다. 이에 대한 당사자는 역시 북한과 미국이다. 한국은 겨우 미국과 중국을 오가며 ‘평화 협정의 당사자는 남북한’ 이라는 입장천명을 부탁만 하는 초라한 입장이 됐다. 북한이 만일 지금 전쟁의 길을 걷지 않는다면 앞으로 미국과 북한이 외교 관계는 급속히 발전할 것이다. 미국과 북한 간에 평화 협정이 서명되지 않는다 해도 미국과 북한은 실질적으로 적대 관계는 해소돼 가고 있는 것이다.

마치 러시아와 중국이 북한과의 옛 조약들을 새로운 국제 환경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수정하듯이 훗날 미국은 북미간의 새로운 환경을 내세워 남한과의 방위 조약을 수정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평화 협정에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북미간의 적대관계 해소라는 시대적 대세를 하루 빨리 읽어야 할 것이다.

이는 두 개의 평화 협정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는 북미간의 평화협정이고, 다른 하나는 남북한 간의 평화 협정이다. 어느 날 우리는 미국으로부터 놀라운 통보를 받게 될 것이다. 미국의 정책은 미국이 알아서 할 테니 남한 정책은 남한이 알아서 하라는 통보일 것이다. 물론 주한 미군을 한국에 주둔시키고 있는 마당이라 표현만은 수사적이고도 우호적으로 할 것이다. 이제 주한 미군은 더 이상 ‘완전한 억지력’이 아닌 것이다.

이에 대한 돌파구는 한국이 찾아내야지 미국이 찾아내주는 것이 아니다. 미국은 한반도에 긴장 있는 휴전을 원하고 있는 것이지, 긴장 없는 평화는 바라지 않는다. 미국의 이익 때문이다. 우리는 이 엄청난 사실을 염두에 둬야 한다. 지금 우리는 긴장 없는 평화를 위해 돌파구를 마련해야 할 시점에 있다. 그 돌파구는 바로 평화 공존 시대를 열자는 폭탄선언으로 시작돼야 할 것이다.


Prev	한국은 쿠데타에 안전한가(33)	지만원


Next	미군만 나가면 남한은 단 한 방 감이다(31)	지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