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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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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 잃은 한국군 (30)

지난 제3공화국으로부터 제5공화국에 이르기까지 일부 정치군인들은 해서는 안 될 일을 많이 저질렀다. 이로 인해 군은 국민들로부터 원성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누구든 군을 때리면 인기가 있었다. 군을 때리면서 대통령의 인기는 엄청났다. 대통령은 개인적인 인기를 얻었지만 군은 지금 처절하게 죽어 가고 있다.

군을 때리는 매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청사진’을 쥐어 주고 때리는 논리의 매이고, 다른 하나는 ‘이제 한번 당해 보라’고 때리는 감정의 매이다. 대통령이 집어든 매는 논리의 매가 아니라 누적된 감정의 매였다. 이로 인해 찢겨져서는 안 될 군복 자체의 명예가 찢겼다. 이는 적진 앞에서 자기 병사의 목을 치는 행위다. 명예 없는 군인이 무엇 때문에 목숨을 버리겠는가.

4성 장군은 군에서 매우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군의 정신적 지주요, 명령의 상징이요, 청운의 꿈을 안고 군에 들어온 모든 청년 장교들이 일생 동안 바라보고 달리는 군 인생의 목표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벌줄 수 있지만 4성 장군이라는 이미지는 절대로 허물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옛날 미치광이라는 히틀러도 그의 정적인 롬멜은 죽였지만 그가 달고 있던 원수라는 계급의 존엄성은 신성시해 주지 않았던가. 그것을 허물면 국가가 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4성 장군은 아무리 죽을 죄를 저질러도 매우 신중이 다뤄야만 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대통령은 하루아침에 육군 참모 총장과 기무사령관을 숙청했고, 그 후 수많은 4성 장군들이 마치 굴비줄처럼 줄줄이 묶여 가는 모습을 전후방 장병들에게 반복적으로 방영케 했다. 그 순간부터 장군은 멸시와 조소의 대상이였다. 누구도 자신의 귀여운 자식을 장군이 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육사 출신 장군들도 그들의 자식을 육사에 보내고 싶지 않았다. “야! 그놈 잘생겼다. 장군감인데.” 옛날엔 듣기 좋았던 말이었지만 이제는 가장 싫어하는 말이 됐다.

4성 장군들이 손가락질 받는데 소위, 중위가 사람으로 보이겠는가. 누가 이런 군대에 들어가고 싶겠는가. 오갈 데 없는 청년들일 것이다. 대부분의 초급 장교들과 하사관들이 나갈 때만 기다리고 있다. 몸은 군대에 있지만 마음은 살아갈 걱정으로 가득 차 있다. 군은 지금 껍데기에 불과한 것이다.

전후방 도시 주변에서 가장 볼품 없이 지어진 아파트들은 백발백중 군인 아파트들이다. 그래도 그 아파트들은 나은 편이다. 아직도 최전방에는 아홉 평 짜리 장교 관사들이 마을의 후미진 곳에 묻혀 있다. 각 세대는 벽으로 구분돼 있지만, 천장은 하나로 연결돼 있다. 쥐들이 찍찍거리면서 이 집 저 집을 뛰어다니며 배설을 한다. 그 천장을 바라볼 때마다, 그리고 그놈의 쥐들 때문에 잠을 설칠 때마다 그들은 얼마나 인생을 한탄하겠는가.

병사들은 현대식 내무반에서 수세식 화장실을 사용하지만 이들 장교들은 재래식 화장실을 드나든다. 병사들보다 더 열악한 환경에 기거하면서도 부대에 출근하면 병사들에게 애로 사항이 없느냐고 물어 봐야 한다. 병사들에게 그 장교들의 모습이 얼마나 초라해 보이겠는가.

그러면서도 이들은 가난을 청빈으로 스스로 미화해 가면서 장교로서의 프라이드를 잃지 않았다. 그 때만 해도 국민들 마음속에는 청백리에 대한 아름다운 인격이 향수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군 전체가 도둑 놈으로 매도된 지금 그들이 프라이드로 생각해 왔던 그 알량한 청빈은 한낱 못난이의 표상으로 전락해 버렸다. 박봉에 시달리며 전선을 지켜주고 있는 그들의 노고에 대한 사회적 보답이 무엇이었는가. 차디찬 비웃음과 멸시의 시선뿐이지 않은가. 지금 군에는 사기는커녕 인격 자체가 사라졌다.

문민 정부에 들어서면서 이 사회에는 인격이라는 것이 모두 다 사라져 버렸다. 대통령의 인격도, 장관의 인격도, 장교의 인격도 모두가 다 하루 아침에 파괴됐다. 서로가 서로의 얼굴에 생채기를 냈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국민의 얼굴에 생채기를 냈고, 국민은 대통령 얼굴에 생채기를 냈다. 대한민국 국민 중에 아직도 인격을 존중받고 있는 사람들이 과연 몇 명이나 남아 있을까. 재벌 총수, 역대 대통령들, 그 누구 하나 이제는 얼굴을 떳떳하게 들고 나리 수 없게 됐다.

인격 없는 국민에게 무슨 애국심이 남아 있겠는가. 인격 없는 대통령에게 무슨 애국심이 있겠는가. 애국심이 있었다면 개인적 인기를 위해 군의 인격을 그토록 찢지는 않았을 것이다. 전방에 있는 장교 한 사람 한 사람과 대화를 나눠보라. 그들의 마음이 얼마나 갈래갈래 찢겨져 있는가를. 프라이드 잃은 장교는 더 이상 장교가 아니다. 그냥 옷만 입고 있는 것이다. 4성 장군도 그렇고 소위도 그렇다.

장교가 무엇인가. 많은 군사 정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아닌가. 전쟁이 나서 적에게 포로가 되면 가장 심한 고문을 받는 사람들이다. 죽어 가면서도 비밀을 지키는 것이 장교의 덕목이다. 그 힘이 어디서부터 나오는가. 프라이드에서 나온다. 그런데 지금의 장교들에게는 그런 프라이드가 없는 것이다. 포로가 되었을 때 죽음을 택할 장교가 과연 몇이나 될까.

적진 앞으로 돌격한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옛날엔 국가와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돌격대에 자원하는 병사들이 많았다. 자기가 존경하는 상관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초개와 같이 버리겠다는 마음우로 돌격대를 자원하는 병사들은 더더욱 많았다.

그러나 지금 이러한 병사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 대통령, 국방 장관, 참모 총장 모두가 다 우습게 보이는데, 그들이 내리는 명령을 누가 존중하겠는가. 병사들은 자기들의 목숨을 지켜 줄 수 있는 도덕성과 능력을 가진 지휘관의 명령만 제대로 따르지 않는가.

고엽제 환자를 보자. 그들은 한때 국민의 사랑을 받던 영웅들이었다. ‘국가의 명예와 운명을 양 어깨에 짊어지고 보무도 당당히 월남 땅으로 떠나가는 저 자랑스러운 모습을 보라’, 이는 당시 이광재 아나운서가 솟구치는 감격을 못 이겨하며, 울음 섞인 목소리로 라디오를 통해 온 국민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만들었던 말이었다. 그 때 국민들은 이들에게 얼마나 많은 꽃다발을 걸어 주었던가. 얼마나 많은 여학생들이 이 자랑스러운 월남 장병 아저씨들에게 감격의 위문편지를 썼던가.

이렇게 영웅이었던 그들이 이제는 고엽제 환자가 되어 외로움 속에서 고통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 날로 썩어 가는 몸을 내보이며 치료를 호소했어도 지금의 문민 정부는 이들을 철저히 외면했다. 그들은 왜 고엽병에 걸렸는가. 상관의 명령을 꼬박꼬박 따르다가 걸렸다. 그들이 떠날 때 국민들이 보여 준 뜨거운 격려에 보답하려다 걸렸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상관을 믿고 열심히 명령을 따랐던 것이 얼마나 허무하고 바보 같은 짓이었는가. 고국을 떠날 때 구름처럼 몰려나와 눈물까지 글썽이며 배웅해 주던 그 감격스럽던 모습들이 한낱 사탕발림이요 한때의 자기 기분에 불과했던 것이라는 사실을 왜 진작 깨닫지 못했던가. 죽는 자만 억울했고, 다친 자만 바보가 아니었던가. 이러한 국가를 누가 믿고 장차 전쟁에서 자기 몸을 던지려 하겠는가.

지금 군은 싸울 능력도 의지도 없다. 겉은 멀쩡해도 속은 비어있다. 이들에게는 북한군이 더 이상 적이 아니다. 전쟁이 나도 악착같이 싸우겠다는 장병들이 없어져 간다. 포로가 돼서 끝까지 비밀을 지킬 장교들이 없어져 간다. 첫째, 누구를 위해 희생하느냐에 대한 비전이 없다. 둘째, 장교로서의 품위와 권위를 지탱해 주는 원동력인 프라이드가 없다. 누가 뭐래도 지금까지 대통령은 소리 없이 군을 죽여 왔다. 색깔이 따로 있고 오열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그가 이 모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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