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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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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정책이 군인 정신을 허물고 있다(28)

YS 재임 2년 10개월 간 그는 통일원 부총리를 6명이나 바꿨다. 대북한 언어를 15번이나 바꿨다. 피는 물보다 더 진하다며 북한에 애정 어린 말을 보냈는가 하면, 북한의 버르장머리를 고쳐 주겠다고도 했다. 북한은 곧 붕괴될 것이니 접수할 만반의 준비를 하라고 했는가 하면, 북한이 곧 쳐들어 올지 모르니 만반의 태세를 갖추라면 국민을 불안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 짧은 기간에 말도 너무 많이 바꿨지만, 말의 내용도 극과 극을 달렸다.

논리적이고 분석적인 말이 아니라 그때그때의 감정을 표현한 말들이었다. 극과 극 사이를 왔다갔다하는 그의 말들은 곧 정책의 부재를 의미한다. 이제까지의 대북 발언들은 그의 예측할 수 없는 정서의 표현들이었다. 북한 당국은 그의 말들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고, 한겹 접어주기를 바란다. 남한 당국은 뚜렷한 비전과 논리가 마련될 때까지 제발 북한만큼은 건드리지 말았으면 한다. 그것은 엄청난 불장난이기 때문이다.

‘가장 위험한 사람 시리즈’가 있다. 머리는 없으면서 바쁘게 설치는 사람, 머리는 없으면서 오기와 소신이 강한 사람, 머리는 없으면서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 등이다. 이 세가지 말들은 모두 다 지금까지의 대북 정책에 잘 적용되는 말들이다.

북한에 경수로를 건설해 주는 문제는 근본적으로 미국의 문제였다. 미국의 문제를 우리가 떠맡고 나섰다. 연간 3천여명의 원전 기술자와 건설 관련자들이 북한을 드나들면 북한이 개방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통일이 되면 우리 것이 된다고 굳게 믿었다. 그만큼 정부는 통일을 확신했다. 온 국민들로 하여금 통일이 곧 임박해 오고 있다는 환상을 갖게 했다. 이러한 환상은 전방에 있는 병사들에게도 확산됐다.

1995년 6월 25일은 1950년에 발발한 625에 이어 또 하나의 국치일이 됐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625 기념식날, 북한으로 가는 첫 배가 쌀을 싣고 동해항을 출항했다. 국문총리를 비롯한 4명의 장관들이 우산을 쓰고 나와 이를 역사적인 순간이라면 열렬히 환송했다.

그 결과가 무엇이었는가. 씨 프린스호가 인공기를 달고 북한에 입항했다. 기념 사진 한 잘 찍었다는 이유로 배가 8일간이나 억류됐다. 정부가 다시는 그런일을 저지르지 않겠다고 각오까지 했다. 쌀주고 빰 맞고 사과했다는 이 기막힌 사실만으로도 우리의 자존심은 산산조각이 났다.

그러나 많은 국민들은 눈에 보이는 이 하나의 망신거리만 가지고 분개했지, 이 행동이 유발시킨 눈에 보이지 않는 파괴 현상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았다. 바로 군인 정신의 파괴행위였다. 동해항은 해군의 2함대 사령부 기지다. 해군과 육군 장병들이 밀집해 있는 군항이다. 그 날은 그 곳 지휘관들이 모든 장병들을 모아 놓고 625남침의 만행을 상기시키고 다시는 제2의 6.25를 당하지 말자고 정신 훈화를 하는 날이다.

그런데 어인 일인가. 바로 그런 날에 그 병사들이 지켜보고 있는 앞에서 국무총리와 4명의 장관들이 나와 박수를 치고 눈시울을 붉히며 그 ‘원수집단’에게 쌀을 보내고 있지 않은가. 이 얼마나 엄청난 충격인가. 판단이 빠른 장병들은 정부의 무모한 행동에 서운함과 실망감을 느꼈다. 그러나 대부분의 병사들은 달라진 세상에 입만 벌렸다.

아! 이제는 통일이 다 돼 가는구나. 그런데 이제까지 우리들을 괴롭혀 온 저 꼴불견인 상관들은 무엇인가. 세상 돌아가는 줄도 모르고 이제까지 우리들에게 온갖 기합을 넣고, 밤샘 보초를 강요하고, 군기를 잡느라 살벌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무더위에 진지 공사와 훈련을 강요해 오지 않았는가. 병사들의 눈에는 그런 장교들이 갑자기 못나 보이기 시작했다. 어찌 하극상이 싹트지 않겠는가. 누가 더 이상 무더위에 진지공사를 하고 싶겠으며, 누가 강추위에 고된 훈련을 받고 싶어하겠는가.

북한군은 이제 무찔러야 할 공산 오랑캐가 아니라 돌봐줘야 할 현제인 것이다. 누구에 의해서건 통일만 되면 됐지 왜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버려야 하느냐고 생각할 것이다. 지금 같은 세상에 싸우다 죽으면 죽는 자만 억울하지 누가 알아 주겠느냐고 생각할 것이다. 이는 가상 시나리오가 아니다. 병사들만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장교들도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

문제는 또 있다. 병사들의 마음이 이렇게 걷잡을 수 없이 변화하고 있는 데도 불구하고 이들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다. 병역 미필자인 대통령이 이들에게 돌을 던지겠는가. 아전 투구에 몰두해 있는 정치인들이 돌을 던지겠는가. 아니면 YS의 신임을 획득한 군의 최고 지휘관들이겠는가. 존경할 수 없는 사람들의 명령을 누가 목숨 걸고 따라 주겠는가. 어설픈 통일 정책이 병사들의 마음과 지휘자들의 입장을 다 같이 허물고 있는 것이다.

북한 병사도 돌봐 줘야 할 대상인데, 그 따뜻한 남한 땅을 찾아온 간첩이야 어떠하겠는가. 더 따뜻하게 감싸 주고 ‘형님’의 아량으로 포용해야 할 ‘동포’가 아니던가. 곧 통일이 될 텐데 간첩 한 사람쯤 와봐야 뭐 그리 뾰족한 수가 있겠는가. 외국에 나가 있는 상사 주재원들은 북한 사람들을 자주 만난다. 그들에게 ‘북한 동포’들은 경계의 대상이 아니라 포용의 대상이다. 대통령이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했지 않았는가.

이제는 ‘간첩’이라는 말을 입에 담는 사람이 골동품같이 느껴지는 세상이 됐다. 분위기를 이렇게 만들어 놓고 왜 간첩죄를 적용하고 있는가. 대통령은 몰라서 저지른 일이겠지만 결과만을 놓고 보면 그의 어설픈 대북 정책은 그 어느 세기적인 간첩도 성취해 낼 수 없었던 어마어마한 이적 행위였다. 이는 눈에 보이는 간첩 행위보다 더 무서운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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