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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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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 핥기 식 국가채무 논쟁

2000년 3월14일. 많은 일간지들이 국가채무에 대한 공방을 기사화 했다. 보도에 의하면 한나라 당 이한구 선대위 정책위원장은 국가가 실질적으로 져야 할 총 부채 규모가 428조원이라고 주장했고, 이에 발끈하고 나선 민주당 김원길 선대위 정책위원장은 국가채무가 111조 뿐이라고 주장했다 한다.

누구의 말이 옳은가? 수치만을 보면 한나라 당 발표가 맞고, 민주당 발표는 엉터리다. 그러나 한나라 당에게도 아쉬움이 남는다. 문제의 진수를 반쪽만 파악했기 때문이다.

반면 민주당은 국민을 우습게 보고 수치를 축소 은폐했다. 그래서 한나라당의 점수를 50이라면 민주당 점수는 "마이너스 100" 정도 된다. 현 시점에서 우리가 지고 있는 빚은 428조를 훨씬 넘는다. 그 빚의 규모도 엄청난 문제지만 더욱 큰 문제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국채와 공적자금을 털어 넣을 수밖에 없는 "블랙홀"의 존재가 더욱 무서운 것이다.

대우 그룹이 95조의 빚을 졌다. 해체 단계에서 국가는 그 중에서 31조의 빚을 공적자금으로 메워줬다. 사기업이 진 빚을 왜 국가가 갚아줘야 하는가? IMF직후 금융기관들에 돈이 거덜나자 국가가 200조 이상의 자금을 공급해 주었다. 이 모두가 선진국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이 바로 선진국과 한국과의 차이다.

김원길 위원장의 말을 인용해보자. "IMF는 정부의 직접 채무만을 국가 채무로 규정한다". 그의 말 대로라면 한국정부도 선진국들처럼 사기업과 은행이 진 빚을 갚아주지 말았어야 했다. IMF 극복 과정에서 한동안 집권당의 정책위 위원장을 지냈다는 사람으로부터 그런 변명이 나왔다는 것은 단순히 놀랍다고만 치부할 수 없다.

IMF는 비단 외환위기 만이 아니었다. 기업과 금융기관 그리고 정부가 경쟁력을 상실한데서 온 위기이기도 했다. 금융기관들이 해마다 적자 경영을 한데다 천문학적인 돈을 기업체들에게 떼었다. 돈이 거덜난 은행들은 고객이 맡긴 돈을 내주지 못하게 됐다. 재경부가 64조라는 맹물 통장을 만들어 금융기관에 채워 주었다.

이들 금융기관들과 금융기관들의 돈을 쓰고 있는 사기업들은 지금도 집권당이 임명한 경영진들에 의해 빚을 눈덩이처럼 불려가고 있는 중이다. 해마다 빚을 늘리기만 할 뿐 갚을 날이 없어 보인다.

만일 정부가 인수한 대우(주)나 대우 자동차가 도산 처리된다고 하자. 그러면 이 두개 회사가 진 빚은 국가가 갚아야 한다. 단지 그 기업들이 도산 처리되지 않고 있다는 이유 하나로 그 기업들이 지고 있는 눈덩이 같은 빚이 국가채무로 분류되지 않고 있을 뿐이다. 이렇게 확실하게 잠재해 있는 빚을 합치면 국가채무는 얼마나 더 늘어날까?

공적자금을 제공받은 금융기관들이 공적자금을 갚을 수 있다면 문제는 없다. 그러나 금융기관들은 경영 능력이 과거보다 더 퇴화돼 있기 때문에 매년 공적자금을 더 마셔댈 수밖에 없다. 금융기관들이 정부 소유로 돼있어서 관치인사와 관치금융이 이전보다 더 심화된 것이다. 지난 해 은행들은 13조원의 적자를 보았고, 은행이 떼인 돈은 계산조차 안되고 있다.

이러한 금융기관들이 공적자금을 갚지 못하면 그 돈도 국민이 부담한다. 사기업이 진 빚까지도 국가가 갚아주고 있는 마당에 재경부 산하기관으로 공적자금을 맡아 관리하는 예금보험공사와 자원관리공사가 지는 빚을 국가가 짊어지지 않는다는 논리는 있을 수 없다.

한국전력은 중앙정부가 운영하는 108개 공기업 중의 하나다. 한전의 빚이 33조라 한다. 외화 빚이 95억 달러라 한다. 지난 1년간 5조의 빚이 더 늘었다고 한다. 만일 대우가 지금까지 해체되지 않았더라면 국가는 31조의 대우 채무를 공적자금으로 갚아줄 필요가 없었다.

역으로 지금 당장 '한전'이 빚을 이기지 못해 '대우'처럼 해체된다고 가정해 보자. '한전'이 진 빚은 결국 누가 갚아야 하는가? '대우'라는 사기업이 진 빚도 국가가 떠 안는 판에 공기업인 '한전'이 진 빚을 어찌 국가가 떠맞지 않겠는가?

국민연금을 제대로 운용하지 못해 기금이 거덜나 있다고 한다. 지급해야 할 연금 액은 많고, 지급해줄 돈이 없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김원길 위원장의 말에 의하면 연금을 국가가 대신 지급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다. 과연 그의 말이 옳은가? 군인연금, 교원 연금이 이미 바닥나서 지금도 정부가 세금을 가지고 메워주고 있다.

김원길 위원장은 이에 대해 어떻게 변명할 것인가? 집권당은 "IMF 당국이 뭐라 하더라"하는 식의 맹목적 사대주의와 무책임한 속임수를 버리고 응용 능력을 가지고 진지하게 국정을 표현해야 할 것이다.

2000. 5. 21 재검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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