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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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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날 기다리는 한국경제

은행 빚을 지고 있는 기업인이 무언의 몸짓으로 은행에 메시지를 전한다. "당신이 지점장으로 있을 때 내 기업이 쓰러지면 지점의 부실채권이 늘어나서 당신이 문책 받게 될 것이다". 이에 대해 지점장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서로에 도움이 되도록 잘 해 봅시다". 기업이 깃털을 세우면 지점장은 꼬리를 내린다. 그리고 부실기업에 물려버린 은행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부채규모를 늘려줄 수밖에 없다.

국민에게 빚을 왕창 지우고 퇴출되어 버린 기업들을 진도 7의 기업이라 하자. 진도 20의 기업들이 있다. 갈 데까지 가보자는 식으로 빚을 천문학적으로 키워가고 있는 기업들이다. 아직도 살아 있는 대우 계열사들의 전부, 워크아웃을 받고 있는 80여 개 중견기업, 은행관리하에 있는 400여 개의 중견기업, 100%의 금융기관, 4대 재벌의 계열사들의 95%, 한국전력, 한국통신, 도로공사, 지하철 공사 등 405개 공기업들의 거의 모두가 지금도 갈 데까지 가보자는 식으로 빚을 키워가고 있다. 지난 한 해 동안 한전이 추가한 빚이 5조다.

워크아웃 기업들에게 계속해서 자금을 대주라며 재정경제부 장관이 채권기관들에게 압력을 넣고있다. 요사이 대우에 자금을 대주는 채권기관들이 목표액의 35% 정도만을 꾸어주고 미적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는 동안 워크아웃 기업들은 자금고갈로 인해 부실을 점점 더 키워가고 있다.

이미 국유화돼버린 금융기관들은 정부의 말을 거역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순순히 따를 수도 없다. 거역하면 인사에서 불이익을 받을 것이고, 따르자니 BIS비율에서 불리한 판정을 받아 곧 닥쳐올 제2차 금융기관 구조조정에서 바람을 맞게 돼 있기 때문이다.

IMF직후 정부는 대형 금융기관을 소유했다. 그 금융기관들은 또 워크아웃, 은행관리를 통해 400여 개의 사기업들을 소유했다. 겉으로 보기엔 정부가 금융기관과 부실 사기업들을 물고 있는 것 같지만 내용적으로 보면, 정부가 이들에게 코가 꿰어있다.

선거전까지는 문제를 솥뚜껑으로 눌러놓았었지만 선거가 끝나면 이들 금융기관, 400여 개의 부실 사기업들 그리고 해마다 빚만 키우고 있는 405개 공기업들이 공적자금과 세금을 더 퍼 넣어 달라며 커다란 입을 벌리게 될 것이다.

재벌들의 폐해에 대해 채찍질 해온 정부가 스스로 재벌 이상으로 공룡화 되어 침몰할 위기에 있다. 현대그룹의 총 자산이 80조 규모다. 그런데 직원 수 150명 규모에 불과한 예금보험공사가 직접 거느라고 있는 금융기관들의 자산만 해도 220조가 넘는다 한다.

여기에 금융기관 통제하에 있는 400여 개의 사기업들의 자산을 합치면 몇 백조가 되겠는가? 예금보험공사는 재경원 장관이 거느리고 있다. 일 국의 경제 장관이 슬하에 이렇게 많은 인력과 자산을 거느리고 있으면 그 효율성이 어떻게 되겠는가? 사회가 국영공화국이 돼 가는 느낌이 든다.

그 뿐이 아니다. 재경부 장관은 그의 슬하에 1,600명 규모의 자원관리공사를 거느리고 있다. 이들은 금융기관들이 가지고 있는 담보물들을 20-30%의 헐값으로 인수하여 약간의 마진을 남기고 골드만 삭스나 론스타 등 외국의 대형 투자업체들에 청소 가격으로 판매하고 있다.

자원관리공사가 시간에 쫓기고 있다는 약점과, 자원관리공사가 담보물을 얼마에 인수했는지를 모를 리 없는 이들 외국인 투자회사들은 시간을 끌어 자원관리공사의 애를 태워가면서 헐값에 땅과 기업을 구입한다.

특히 무담보로 신용대출을 해주었던 부실기업은 대출 액의 5%도 안 되는 헐값에 기업을 통 채로 인수해 약간의 마진을 남기고 쓰레기 값에 외국에 팔아 넘기고 있다. 한마디로 정부는 국부를 팔아 DJ 정권을 연명시켜주고 있는 것이다.

자원관리공사의 기관장은 망해 가는 기업을 살릴 수 있는 한국 최고의 경영 능력을 가진 사람으로 임명한 것이 아니라 경영은 모르더라도 말 잘 듣는 공무원 출신으로 임명했다. 기업을 살리려면 오랜 기간이 필요하다. 이는 국가에는 좋겠지만 정권에게는 해가 될 수 있었다. 헐값에라도 빨리 팔아서 정권 유지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는 것이 더 급한 일이었다.

4.13 16대 총선에 정권의 운명을 걸었던 현 정권에게 선거전에 또 다른 공적자금이 수혈돼야 한다는 사태가 발생하는 것만은 막아야 했을 것이다. 기업에게 시간을 주고 자생력을 키워줘야 할 정부의 구조조정이 궤도를 이탈해 달리고 있는 것이다.

왜 그렇게 하고 있을까? 아마도 단기성과에 급급해 있을 것이다. 잘못 출발한 구조조정 과정에 너무나 많은 돈을 쏟아 붓고, 그 쏟아 부은 수 백조 단위의 대패 밥 같은 돈이 일회성 불길로 거의 다 타 없어짐에 따라 제2차 구조조정에 퍼부을 급전을 마련해야 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정부의 구조조정은 왜 빗나가게 됐을까? 시스템에 대한 개념조차 없이 권력의 힘만 믿고 첫 단추를 잘못 끼웠기 때문이다. 외국기업들이 물밀 듯 들어옴에 따라 한국 기업들은 제품개발, 품질, 가격, 마케팅, 경영능력 모두에서 턱없이 밀리고 있다. 은행돈으로 연명해온 기업들이 속속 쓰러짐에 따라 은행들도 같이 쓰러질 것이다. 이에 대해 정부는 속수무책이다.

국부를 생산하는 경제주체는 기업과 정부 그리고 농어촌이다. 이들 3대 경제 주체는 경쟁력 상실로 인해 1달러 소비에 대해 1달러 이상의 가치를 창조하지 못하고 있다. 정부는 이들의 경쟁력을 키우기는커녕 이들 모두에게 도덕적 해이만 부추기고 있다.

농림부 장관이 6개월에 한 번 꼴로 벌써 네 번째 농촌 빚을 탕감해주고 있다. 정부가 빚을 갚아주는 데 어느 농부가 열심히 일하겠는가? 정부가 돈을 대주는데 어느 기업인, 어느 은행 인들이 피땀을 흘리겠는가?

정부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빚을 키우고 공적자금이라는 맹물을 만들어 거국적 규모의 블랙홀에 퍼부을 것이다. 퍼부은 것만큼 도덕적 해이라는 한국병은 깊어만 갈 것이다. 그렇게 해서 정권은 얼마간 연장된다지만 국가는 어떻게 되겠는가!

2000. 5.21 재검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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