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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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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의, 시너지 제2의 수단

계란이나 사과의 모양과 크기는 누구의 눈에나 잘 보인다. 하지만 업무의 모양과 크기는 쉽게 보이지 않는다. 만일 팀장의 눈에 업무의 모양과 크기가 보이고, 각 팀원의 능력이 보인다면 팀장은 아주 손쉽게 A에게는 작은 사과 상자를, B에게는 큰 계란 상자를 들라 할 것이다. 하지만 팀장에게는 팀원의 능력도 보이지 않고 업무의 모양과 크기가 잘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많은 간부들은 이 말에 동의하지 않을 지 모른다.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데 하물며 지능을 갖춘 사람이 한 회사에서 잔뼈가 굵었는데 어찌 그 정도야 모르겠습니까?". 이런 사람일수록 사정을 모르고 주먹구구식으로 간부 노릇을 한다. 팀원의 능력이 보이고 업무의 모양과 크기가 보인다고 믿는 팀장은 착각을 믿는 것이다.

미술가들이 똑 같은 대상을 놓고 그림을 그리지만, 어떤 그림은 3류이고 어떤 그림은 걸작이다. 업무를 수행하는 능력도 이와 똑 같다. 필자는 25세에 소위로 첫 부임지에 나갔다. 사관학교에서 이학사를 수여 받은 게 전부였지 군에 대해 별로 아는 게 없었다. 중대장이 사고를 당하자 대대장님은 그래도 사관학교 출신이라고 해서 내게 임시 중대장직을 맡겼다.

업무의 모양과 크기에 대해 전혀 감이 없었다. 크고 작은 모든 업무를 분대장 이상의 간부들과 하나 하나 물어가며 토의를 했다. 어느 간부가 설명을 하면 다른 간부가 허점을 지적하거나 정정을 했다. 한 사람의 간부가 알고 있는 지식과 경험은 이렇듯 언제나 불완전한 것이다.

토의의 장을 마련해주고 누구나 격의 없이 말 할 수 있도록 편안하게 유도해주니까 업무의 모양과 크기가 드러났다. 토의하는 과정에서 간부들의 능력이 드러났다. 토의에 참가했던 모든 간부들이 각자 가지고 있던 막연한 그림을 수정해가면서 누구나 새로운 업무에 대해 확실한 이해를 하게 됐다. 업무에 대한 확실한 스펙이 그려진 것이다.. 토의라는 과정이 없었다면 업무의 모양과 크기가 간부마다 달랐을 것이다. 스펙이 누구에게나 확실해 지자 일을 나누는 것은 문제도 아니었다.

반면 경험이 많은 이웃 중대 고참 대위들은 자기의 오랜 경험을 가지고 일방적인 지시를 내렸다. 그가 생각하는 업무의 모양과 크기는 현실과 많이 달랐다. 간부들이 생각하는 것과도 많이 달랐다. 혼돈이 오고 불평도 나왔다. 소위가 지휘하는 부대가 고참 대위들이 지휘하는 부대보다 훨씬 더 우수했다. 토의의 위력이 바로 이런 것이다.

필자는 30세에 월남에 가서 포대장(포병중대장)을 했다. 모든 점호, 모든 집합을 생략하고 각 분대장 인솔하에 자발적으로 하루를 보내라고 방침을 정했다. 무덥기 이를 데 없는 월남에서 내무반을 지하 벙커식으로 짓고 있는 병사들에게 긴 작업복이 거추장스럽게 보였다. 작업복을 모두 마음대로 잘라 입으라 했다. 포대를 방문하는 사람이면 어느 분대는 사격을 하고 어느 분대는 식사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의 눈에는 이것이 무질서로 보였다. 저들의 눈과 필자의 눈이 다른 것이다.

모든 권한을 분대장에게 부여하는 대신 포대장은 매일 저녁 2시간씩 분대장 이상의 간부들과 토의를 했다. 무순 일을 해야 하며 그 일을 가장 효율적으로 하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으며, 각각의 업무를 수행하는 데 따르는 안전사고의 가능성이 무엇이며 예방책은 무엇인가에 대해 토의했다. 필자가 부임해보니 제2분대장이 말을 더듬는다는 이유 하나로 고문관 소리를 듣고 의기소침해 있었다.

하지만 토의가 일상화되고 업무수행능력이 누구의 눈에나 확연히 비쳐지자 그는 고문관에서 일약 유지가 됐다. 이들은 토의를 재미있어 했다. 토의를 통해 업무의 스펙이 누구의 눈에만 명확해지기 때문에 자신감을 갖게 됐다. 일을 피하려는 게 아니라 일감을 적극적으로 발굴해내려 했다. 그들은 부대 생활 자체를 행복으로 여겼다. 이러한 시스템을 만들어 놓자 포대장은 별로 할 일이 없었다. 시스템을 설치해놓으니까 시스템이 일을 한 것이다.

토의가 없었을 때에는 누가 유능한 지 모른다. 업무의 스펙이 막연해서 간부들이 불안을 느낀다. 불안은 불만을 낳고 사고를 낳는다. 군대는 물론 모든 정부기관과 기업이 바로 이런 식으로 일을 한다. 심지어는 대통령도 이렇게 일한다.

필자가 있던 국방연구원에서 미국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한국인 학자를 유치했다. 그에게 호봉이라고 불리는 연구소 계급을 부여해야 했다. 너무 높게 주면 기존의 간부들이 불평할 것이고, 너무 낮게 주면 유치학자를 서운하게 할 판이었다.

회의 진행자인 부원장이 8명의 간부를 불러 회의를 했다. 인사과에서 그의 경력을 기계적으로 해석해서 7.2호봉이라는 계급을 산출해냈다. 진행자는 시계방향으로 돌아가면서 각자의 의견을 말해달라고 했다.

맨 처음에 대답한 사람이 7호봉을 제안했다. 돌아가면서 동감을 표했다. 맨 나중 사람이 왜 7호봉이냐고 물었다. 아무도 대답을 못했다. 단지 사사오입을 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사사오입을 하자고 간부회의를 소집했다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회의의 형식은 나무랄 데 없는 민주주의 방식이었다. 그러나 그 회의의 질은 형편없는 것이었다. 맨 나중에 차례를 맞은 필자가 회의의 무효화를 제기했다. "간부들은 오직 7.2 라는 숫자가 쓰여진 종이 한 장 받아 쥐고 있을 뿐입니다.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토의를 해야 합니다. 그래야 논리가 전개되고, 그 논리에 의해 각자는 자기의 마음을 정할 수 있습니다. 마음을 정한 후에 각자의 의사결정 결과를 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의가 받아 들여졌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더 많은 정보가 도출되고 논리가 전개될지 막연해 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필자가 유치학자를 불러 차를 함께 마시게 했다.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엄청난 정보였다. 10분 후, 그를 보냈다. 그리고 칠판으로 나갔다.

"자, 유치학자를 보셨지요. 유치학자와 견줄 만한 기존학자들의 이름을 열거해 보십시오". 모두가 한 두 명씩의 이름을 거명 했다. 그 이름들을 칠판에 써놓고 한사람씩 견주어 갔다. 누가 더 높고 낮아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들이 백출했다.

마지막에는 김 박사보다는 높고 이 박사보다는 낮아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는 9호봉으로 결정되었다. 진행자의 회의방식은 창의력을 유도시키지 못했지만 필자의 방법은 참석자들의 창의력을 유도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회의가 생산성을 올리지 못하고 있다. 좌장 때문이다. 이들은 문제의 본질을 정의해 내고, 그 문제를 풀어가기 위해 창의력을 이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딱딱한 분위기에서 형식적으로 시간을 통제하는 타임 키퍼(time-keeper)로만 역할하고 있다. 회의가 딱딱하고 관료주의적이다. 아이디어의 촉진자가 아니라 방해자이다.

한국기업에서 이뤄지는 거의 모든 회의는 창의력을 유발시키는 회의가 아니라 소문으로 이미 다 알고 있는 이야기들을 돌아가며 말하는 뉴스 발표장(news exchange meeting)일 뿐이다. 99.%가 시간낭비다. 일류기업의 회의일수록 들어가서 잔뜩 얼고만 나온다.

2002. 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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