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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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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6일 KBS 1라디오 강연내용

국가개혁에 대한 시스템적 진단

오늘은 국가 개혁에 대한 시스템적 진단이라는 제목으로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볼까 합니다. 93년도에 저는 "신바람이야 시스템이냐"라는 책을 섰습니다. 그때만 하더라도 시스템이라는 낱말은 매우 생소했습니다. 지금은 거의 모든 국민이 매우 자연스럽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막상 시스템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딱 부러지게 설명하는 사람은 매우 드뭅니다.

시스템이 무엇인지 그 정의부터 말씀드리고저 합니다. 여러 개의 요소로 구성된 유기체 덩어리를 시스템이라고 말합니다. 요소 상호간에는 논리적인 연관관계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 연관관계에 의해 일일이 외부에서 간섭하지 않더라도 자기들끼리 치고 받으면서 어떤 일을 수행하는 유기체 덩어리를 시스템이라고 말합니다.

가장 전형적인 시스템의 표본은 인체입니다. 수많은 장기가 있습니다. 장기 상호간에는 견제와 균형이라는 논리적 연관관계가 있습니다. 일일이 대뇌에서 명령을 내리지 않더라도 자기들끼리 치고 받으면서 건강을 유지합니다.

우리가 타고 다니는 자동차도 시스템입니다. 3만여 개의 부품들로 구성돼 있습니다. 부품을 일렬로 나열해 놓으면 콩가루에 불과합니다. 시스템이 아닙니다. 논리적 연관성에 따라 배열해야만 자동차라는 시스템이 생깁니다. 자동차가 내는 힘을 생각해 보십시오. 엄청난 괴력입니다. 그러나 그 자동차를 만든 사람들이 직접 내는 힘은 미미합니다. 달밤에 체조입니다. 바로 여기에 엄청난 교훈이 있습니다. 사람은 시스템을 만들고 시스템으로 하여금 괴력을 발휘케 해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이 엄청난 교훈을 우리 한국인들은 너무 오래 몰랐습니다. 시스템이 없으면 콩가루 힘만 난무할 뿐 절대로 괴력을 낼 수 없습니다.

시너지라는 말이 유행입니다. 시스템 에너지의 준말입니다. 시스템이 내는 괴력을 이용하자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엔 시스템이 별로 없습니다. 겨우 있는 것이 은행 객장에 설치된 "순번대기번호표 시스템" 정도입니다.

은행 객장을 보십시요. 과거 수십 년간 은행 객장에는 질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순번대기번호표"시스템이 등장했습니다. 그 간단한 시스템이 등장하자 수십 년간의 고질병이 순간적으로 치료됐습니다. 은행에 보이지 않는 손이 설치된 것입니다. 그 보이지 않는 손 즉 시스템 하나 설치하면 될 것을 가지고 우리는 과거 수십 년간 은행 객장의 무질서를 손가락질하면서 애꿎은 국민의식만 탓했습니다.

지금 와서 보면 과거의 무질서함은 의식 탓이 아니었습니다. 시스템 탓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의식과 행동은 시스템의 산물입니다. 의식과 행동을 훌륭하게 가꾸고 싶으면 그렇게 가꿔질 수밖에 없도록 시스템을 만들어야 합니다. 순번대기번호표 시스템을 보십시오. 질서를 안 지킬래야 안 지킬 수가 없지 않나요? 이와 같이 시스템이란 "그렇게 하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그렇게 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도구입니다".
"해보니까 안되더라", "우리는 안돼, 의식이 틀렸어", "제도야 훌륭하지, 제도가 없어서 안되나? 운영을 잘 해야지". 모두가 시스템 무지에서 나오는 말들입니다.

의식이 어째서 시스템의 산물인지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3대의 공중 전화기가 있습니다. 한국인들은 세 줄을 섭니다. 선진국 사람들은 한 줄을 섭니다. 가장 짧은 줄을 골라서 섰지만 그날은 재수가 안 좋아 오래 기다렸습니다. 그때 무엇을 느끼겠습니까. "일찍 와야 소용없다. 줄을 잘 서야 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사회 곳곳이 이처럼 요행에 의해 차례를 배분한다면 그 속에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요행의식이 자랄 것입니다. 요행이 차례를 배당해주는데 누가 열심히 일하고 공부하고 저축할 것입니까? 요행이 좌우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일이 꼬이면 점장이에게 달려갑니다. 이런 사회에 무슨 과학이 생기고, 시스템이 생기겠습니까?

반면 선진국 사람들은 한 줄을 섭니다. 맨 앞에 서있는 사람이 먼저 끝나는 전화를 차지합니다. 일찍 오면 일찍 차례가 옵니다. 예측이 가능해집니다. 투명해 집니다. 사회 곳곳이 이렇게 투명한 논리에 의해 차례가 배분되면 그 속에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논리의식이 자랍니다.

이렇듯 시스템은 의식을 바꿉니다. 의식을 개혁하라는 말하는 사람은 아무 일도 하지 못합니다. 의식이 좋아질 때까지 기다리자는 사람입니다. 그 좁은 은행 객장에서의 질서도 시스템이 없으면 무너지는데, 하물며 수천만의 경제적 동물이 각축하는 경제 사회에 시스템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으니 그 무질서가 오죽하겠습니까? 오늘날의 위기는 바로 무질서의 산물입니다.

시스템의 위력에 대해서는 등을 돌린 채, 의식만 개혁하라고 합니다. 내가 낳은 자식의 의식도 고치지 못하는데 남남으로 구성된 사회에서 누가 누구의 의식을 고친단 말입니까? 의식을 고치지 않았는데 은행 객장의 질서는 왜 좋아졌습니까? 미국, 유럽, 싱가포르 등이 의식개혁을 통해 선진국이 됐습니까? 그들은 시스템 개발에 최고의 두뇌와 돈을 사용합니다. 만일에 미국에도 우리처럼 시스템이 없어 보십시오. 수많은 인종들이 벌이는 무질서야말로 가공스러울 것입니다.

시스템은 만들지 않고 괴력을 내고싶어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일수록 시스템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공자님 말씀을 가지고 당위성을 강론하는 사람, 여기 저기 다니면서 잘못된 것을 지적하는 사람, 다른 사람들에게 의식을 개혁하라고 강요하는 사람, 지시에 따르지 않으면 엄벌을 내리겠다는 사람은 시스템의 힘을 내는 게 아니라 달밤에 체조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국가를 경영하면 국가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지난 8월12일에 118명을 태운 러시아 잠수함 크루스크호가 수심 108미터에서 수장됐습니다. 러시아 해군이 구조에 실패했습니다. 그들은 해치를 열 수 없었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런데 8.21일에 놀르웨이 잠수부들이 해치를 열었습니다. 이 사실에 접한 러시아인들은 정부에게 또 거짓말을 했다고 욕을 했습니다. 푸틴 대통령은 침몰사실을 보고 받고도 휴양지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러시아 해군은 승무원의 명단조차 갖고 있지 못했습니다. 누군가가 러시아 해군 사령부 앞에 "분노하지 않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지 않는자"라고 낙서를 했다 합니다.

러시아 정부는 무능과 나태함을 변명하고 속이기에 바빴습니다. 그러한 정신을 가졌기 때문에 대 러시아 함대가 노르웨이 잠수부만 못했던 것입니다. 구조 시스템 자체가 없어서 영국과 노르웨이에 구조 요청을 했습니다. 무능한 사람들이 자리만 향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푸틴 대통령이 이끄는 러시아의 앞날은 구태어 기다려보지 않아도 훤히 보입니다.

타이타닉 호가 수많은 이들의 꿈과 사랑을 수장시켰습니다. 그 꿈과 사랑은 스무 살이 채 안된 남녀의 지고지순한 사랑으로 응집됐습니다. 거미줄 같은 상류사회 규범에 얽매여 숨막혀하는 로즈의 영혼을, 신선하고 자유분방한 영혼을 간직한 하류사회의 청년이 해방시켜주는 아름답고 감동적인 드라마였습니다. 그 사랑은 타이타닉 호에 승선했다는 이유 하나로 단 하루만에 수장됐습니다.

그 사랑이 귀하고 안타까웠던 것만큼 그 배를 무책임하게 질주시켰던 선장이 미웠습니다. 2천여 명의 생명을 책임진 선장은 엉뚱하게도 다음날 아침 뉴욕의 일간지를 장식할 자신의 영광에 도취돼 있었습니다. 갑판 위에 나와 부하가 따라주는 따끈한 홍차의 맛을 음미하는 선장의 얼굴에, 위험에 대비하려는 자세는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비참했던 화면에 흐르는 그 음산한 테마 곡이 한국의 서쪽 하늘에서 들려오고 있습니다. 나의 꿈, 나의 사랑을 실은 한국호가 지금 바다 속으로 빠져들고 있습니다. 빈곤과 무질서가 내 자식들의 꿈과 사랑을 앗아가고 있습니다. 일자리는 줄어들고 세금과 물가에 쪼들릴 우리 자식들의 비참한 환영이 부각됩니다.

우리는 IMF를 위기라고 부르지만 그것은 여름날의 지나가는 한줄기 소나기에 불과했습니다. 그것은 종금사, 은행, 기업들이 마구잡이로 외화를 꾸어다 쓰고 갚을 날짜에 갚지 못해서 발생한 금융 사고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앞으로 우리에게 곧 다가올 위기는 총체적 경쟁력 상실과 대량 실업으로부터 오는 구조적이고도 만성적이며 매우 비참한 진짜 위기입니다.

지난 몇 년간 우리 경제는 내리막길을 달려왔습니다. 이제는 브레이크 마저 빠져 버렸습니다. 더러는 경기가 좋아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찻잔 속에 나타난 일시적 착시 현상이요, 2년 동안 정부가 풀어헤친 230여 조의 돈이 대패 밥처럼 타고 있는 모습일 뿐입니다.

지난 정부들은 국가의 빚을 최소한으로 줄여왔습니다. 그러나 현정부에 들어 국가 빚이 파격적으로 늘어났습니다. 230조의 대팻밥은 바로 그 빚이었습니다. 지금 그 대팻밥은 다 타고 없어졌습니다. 40조-60조원의 대팻밥이 더 필요하다고 합니다. 국가 빚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늘어나겠습니까? 그 대팻밥이 타고나면 기업, 금융기관이 동반하여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대량실업이 눈앞에 보입니다. 무너지기 전에 하이에나 떼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배운 사람들까지도 우루루 나서서 제 몫을 뜯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호는 더 빨리 가라앉고 있습니다.

의사가 사람을 진단하듯이 저 같은 시스템 공학자는 사회를 진단합니다. 제가 보기엔 지금 한국호의 운명이 매우 암담합니다. 크루스크호 사고에서 보여준 러시아 정부의 모습이, 타이타닉호 경영진의 모습이, 바로 한국정부의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제가 보기엔 한국경제가 타이타닉호처럼 가라앉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정부는 경제의 승전보만 방송하고 있습니다. 6.25 때 국군의 거짓말을 상기케 합니다. 6.25 전쟁이 터지면서 국군은 줄곧 밀리기만 했습니다. 포성이 서울에 들리고 있는데도 국군은 승전보만 방송했습니다. 그 거짓 방송 때문에 수만 명의 지도급 인사들이 살해됐고 수백만 시민이 고초를 겪었습니다.

"한국호의 침몰"! 저는 2주전에 "한국호의 침몰"이라는 경제진단서를 내놓았습니다. 수치만 보면 그를 듯 해이지만 시스템을 보면 이미 태국이나 인도네시아의 모습을 향해 이미 가라앉고 있다는 사실을 사실대로 경보하기 위해 썼습니다.

저는 22가지 시스템을 긴급 처방전으로 내놓았지만 시스템을 모르는 정부가 채택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저는 현 정부의 능력과 한계를 매우 잘 압니다. 설사 시스템 대안들이 지금부터 실천된다 해도 한국호는 일단 인도네시아 상태로 내려갔다가 다시 떠오르게 될 것입니다.

하물며 정부가 그런 일조차 외면해 보십시오. 감히 단언하건데 정부는 구태의연한 지금의 패러다임을 바꾸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문제는 지금부터 매우 빠른 속도로 악화될 것입니다. 앞으로 10년 이상 우리 경제는 악화일로를 걸을 것입니다.

1960년대에 인도네시아, 태국, 필리핀은 새까맣게 올려다 보이는 선진국이었습니다. 어쩌면 우리 본래의 수준이 그들의 수준일 지도 모릅니다. 지난 40년간 그들보다 나았던 것이 돌연변이였을지 모른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한국 정치인의 지도력이 그들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국가 수준이 그들과 같아지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호가 침몰하면 우리 모두가 침몰합니다. 모두가 국제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 극기를 반복해야 하지만 모두가 내 몫만 먼저 챙기려고 번뜩입니다. 대부분의 기업들은 공기업 사기업 할 것 없이 은행으로부터 더 많은 돈을 빌려가려는 도덕적 해이에 빠져있습니다. 더러는 그 돈으로 월급과 퇴직금을 올리고, 더러는 비자금으로 빼내다가 달러로 바꿔 외국으로 빼돌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진 빚은 국민이 고스란히 떠 안고 있습니다.

시스템적 시각으로 경제를 바라보면 한국호의 침몰이 눈에 보입니다. 국부 즉 GNP를 창출하는 경제 주체는 3 개입니다. 기업, 정부, 농어촌입니다. 이들 경제 주체들은 모두 1달러를 쓰면 1달러를 내놓지 못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국부가 늘어나겠습니까? 자, 먼저 가장 효율성이 높은 기업을 보겠습니다.

한국의 사기업들 중에 흑자를 낼 수 있는 기업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대우의 경우를 보시지요. 60여 개 기업들 중에 흑자를 내는 기업은 한 개도 없었습니다. 다른 그룹을 보십시요. 내부 소문들에 의하면 현대나 삼성이 가지고 있는 기업들 중에서 흑자를 내는 기업은 불과 다섯 손가락을 넘지 못합니다. 나머지는 은행에서 빚을 얻을 수 있을때까지 얻어가면서 연명하는 기업들입니다. 이들이 빚을 갚을 날은 없어 보입니다.

정부는 어떤가요? 정부가 1달러를 쓰면 아마도 50전 이하를 내놓을 수 있을 것입니다. 405개의 공기업이 있습니다. 중앙정부가 108개의 공기업을, 지방정부가 297개의 공기업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장 건실하다는 한전을 보십시오. 매년 빚이 누증되고 있습니다. 장부 가액만 하더라도 내체가 33조, 외채가 95억 달러입니다. 지난 한 해에 새롭게 발생시킨 빚만 해도 5조입니다.

국영기업 모두가 빚을 키워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수당을 늘리고 퇴직금을 늘려가고 있습니다. 지난 해, 8천만원 이상의 연봉을 받는 사람들이 1,000명이나 늘어났습니다. 여기에 600여 개의 정부산하단체가 또 다른 빚을 키워가고 있습니다.

서울시가 운영하는 지하철만 하더라도 누적적자가 5조이며 여기에 매년 1조 이상의 빚을 더해가고 있습니다. 나가는 돈은 100원인데 들어오는 돈은 60원입니다. 청주공항 건설에 700억 원이 투입됐지만 단 한 대의 비행기도 뜨고 내리지 않습니다. 평택항구에 3천억 원이 투자됐지만 을씨년스럽게 방치돼 있습니다. 시화호에 2조 단위의 예산이 투입됐지만 애물단지로 방치돼 있습니다. 정부가 하는 사업은 거의가 다 부실공사입니다. 그래서 해마다 빚이 누적되고 예산이 증가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농어촌이 1달러를 쓰면 얼마의 가치를 창출할까요? 이에 대한 통계는 없지만 제 생각으로는 단 30전을 창출해내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난 7년간 농촌에는 70조라는 엄청난 빚이 누적돼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GNP를 생산하는 3대 경제 주체 모두가 1달러 소비에 대해 1달러 미만을 내놓는데 어떻게 경제가 좋아질 수 있을까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정부는 빚을 증가시켜 대팻밥처럼 뿌렸을 뿐, 경쟁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노력을 전혀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부실한 기업과 부실한 금융기관에 돈을 퍼주었습니다. 도덕적 해이가 말이 아닙니다. 경쟁력이 하늘에서 저절로 떨어집니까? 경쟁력은 시스템의 산물입니다. 시스템에 착안조차 안하고 있는데 어떻게 경쟁력이 생기겠습니까?

IMF직후 금융기관들이 돈을 떼어, 국민이 저축한 예금을 내줄 수 없었습니다. 정부가 이를 국민세금으로 메워줬습니다. 공적자금을 받은 금융기관들이 국유화됐습니다. 그 금융기관들은 또 은행 자금을 수혈 받은 400여 개의 사기업들을 은행소유로 전환했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정부가 금융기관과 부실기업들을 물고 있는 것 같지만, 내용적으로 보면 정부가 이들에게 코가 꿰어있습니다.

선거가 끝나기가 무섭게 이들 금융기관, 부실기업, 그리고 해마다 빚만 키우고 있는 405개 공기업들이 공적자금을 더 퍼 넣어 달라며 입을 벌리고 있습니다. 정부가 이들에게 빚쟁이로 전락해 있는 것입니다. 재벌의 공룡화에 대해 채찍질을 가해온 정부가 스스로 재벌 이상으로 공룡화 되어 거미줄에 묶인 채, 침몰할 위기에 놓여있는 것입니다. 이런 정부가 GNP의 75%이상의 돈을 쓰고 있으니 어찌 경제가 잘 돌아가겠습니까?

1999년도의 현대그룹의 자기자본이 20조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금보험공사가 직접 거느라고 있는 금융기관들의 자기자본이 220조입니다. 여기에 금융기관 통제하에 있는 400여 개의 사기업들의 자산을 합치면 몇 백조가 되겠습니까? 일 국의 경제장관이 슬하에 이렇게 많은 인력과 자산을 거느리고 있으면 그 효율성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 사회는 지금 국영화 과정을 통해 가장 비효율적인 시스템 즉 사회주의 국가 체제로 전환돼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재경부 장관은 그의 슬하에 1,600명 규모의 자원관리공사를 거느리고 있습니다. 이들은 금융기관들이 가지고 있는 담보물들을 20-30%의 헐값으로 인수하여 약간의 마진을 남기고 골드만삭스나 론스타 등 외국의 대형 투자업체들에 청소 가격으로 판매하고 있습니다.

이들 외국 투자회사들은 자원관리공사가 시간에 쫓기고 있다는 약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자원관리공사가 담보물들을 얼마에 인수했는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시간을 끌어 자원관리공사의 애를 태워가면서 담보물 즉 땅과 건물과 기업을 헐값으로 구입해 가고 있습니다. 국부를 팔아 현정권을 연명시켜주고 있는 것입니다.

구조조정은, 말만 구조조정이었지 내용적으로 보면, 한참 타고 있는 불길에 휘발유를 부어주는 행동에 불과했습니다. IMF를 맞이할 때까지 수많은 기업과 금융기관들이 도덕적 해이에 빠져 있었습니다. 현정부는 모든 기업들로 하여금 도덕적 해이로부터 벗어나 경영능력을 키울 수밖에 없도록 시스템을 짜주는 한편,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 경쟁력을 기르기 위한 범 국민적 리더십을 발휘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매우 안타깝게도 현정부는 이와는 정반대로 일했습니다. 부실했던 금융기관과 기업들에게 230조 규모의 자금을 쏟아 부어 주었습니다. 빚을 갚지 않은 농민에게 매 6개 월 마다 한번씩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그것이 도덕적 해이를 더욱 더 부추긴 것입니다. 공적자금, 그것은 보약이 아니라 독약이었습니다.

외국기업들이 물밀 듯 들어옴에 따라 한국 기업들은 제품개발, 품질, 가격, 마케팅, 경영능력 모두에서 턱없이 밀리고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지난 2년 이상 성장을 계속해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정부가 뿌린 230조 규모의 대팻밥이 타는 효과였습니다. 그 대팻밥이 소비를 유발시켰고, 공장을 돌려주었으며, 묻지마 식 주식투자 붐을 조성하여 기업에 자금을 공급해 주었습니다. 그 대팻밥 때문에 비록 부실기업이라 해도 한시적으로나마 생명을 연장해올 수 있었습니다.

1970-80년대에 한국은 아시아의 4마리 용 중에서 가장 높은 경제성장 속도를 자랑했습니다. 1991년 한국 생산성본부가 집계한 자료를 보면 1970년대의 GDP 성장률은 16.7%, 1980년대의 GDP 성장 율은 10.5%나 됐습니다. 이는 성장률 10%를 맴돌던 다른 용들에 비하면 매우 높은 수치였습니다.

한국의 경제학자들은 이 화려한 경제지표에 만족해하며 한국경제가 곧 일본을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라며 들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그들만의 우물안식 생각이었습니다. 오늘날의 일본경제가 어떻게 해서 구축됐고 이에 반해 한국경제가 얼마나 취약한 기초 위에 세워져 있는지를 전혀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국인들이 지표 경제에 들떠있던 바로 그때 미국의 미래연구소의 어느 한 시스템학자는 1988년 여름 LA지역 세미나에서 한국이 머지 않아 용의 그룹에서 탈락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리고 매우 유감스럽게도 지난 20년간 한국경제는 그가 예언했던 코스대로 추락해 왔습니다. 한국경제는 1980년대가 끝나면서 용의 그룹에서 탈락했고, 지금은 더 빠른 속도로 추락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은 지금도 한국경제는 잘 나가고 있다며 낙관론을 펴고 있습니다.

똑 같은 한국경제를 놓고 어째서 한국 경제학자들과 미국의 시스템학자가 각기 다른 평가를 내렸을까요? 지표에만 익숙해진 한국인들과는 달리 그는 한국경제의 시스템을 관찰했습니다. 경제성장의 엔진을 보았습니다. 미국인 학자는 다른 3마리의 용, 즉 싱가포르, 홍콩, 대만은 두뇌기술에 의해 경제성장을 주도하고 있지만 한국은 기능공의 손끝기술에 의해 경제성장은 주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관찰했습니다.

두뇌기술은 새로운 제품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기술입니다. 새로운 제품을 만들어야 국제시장에서 제값을 받을 수 있고, 새로운 제품이 끊임없이 나와야 일자리가 계속적으로 창출됩니다. 그러나 손끝기술은 남이 설치해준 공정에서 남이 가르쳐준 방법을 손끝에 익혀 기계를 돌릴 수 있는 기술에 불과하기 때문에 고부가가치를 만들어 낼 수도 없고 일자리도 만들어 내지 못합니다.

그 미국인은 한국시장이 개방되고 한국의 임금 수준이 선진국에 육박하는 순간부터 한국에는 대량 실업사태가 찾아올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한국이 이러한 딜레마를 비켜갈 수 있는 길은 하루 빨리 OEM 체제 즉 "선진국 제품을 원숭이 식으로 생산해서 납품하는" 하청 생산 체제에서 벗어나 독자기술 기반을 구축해야 한다고 진단했습니다.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과학인력과 설계인력입니다. 그런데 한국엔 설계 인력이 없습니다. 그나마 어려웠던 시절에 육성해놓았던 대덕 연구단지조차 붕괴되고 있습니다. 1998년 한해에만 6,000-8,000명의 과학자가 해외로 유출됐습니다. 구조조정 제1의 대상이 그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설계인력은 아예 없습니다. 길러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나마 있던 과학촌 마저 무너지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설계에 돈을 쳐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머리 좋은 학생들이 법대만 갑니다.

설계인력을 기르는 건 식은 죽 먹기입니다. GNP의 75%를 정부가 씁니다. 정부가 추진하는 모든 사업에 설계를 의무화하고 돈을 많이 주면 외국의 일류 설계 인력이 들어옵니다. 그들과 함께 일하면 우리의 설계 인력이 양성됩니다. 이렇게 쉬운 일마저 정부는 할 줄 모릅니다. 일하는 손은 안 보이고 빨대만 보입니다.

지금의 한국경제는 반도체, 자동차, 철강, 유화, 조선 등 불과 몇 개의 기둥에 의해 지탱되고 있습니다. 이 몇 개의 기둥이 무너지면 한국경제도 무너집니다. 난관을 헤쳐나가야 합니다. 할 일이 많습니다. 그런데 되는 일이 없습니다.

장관들을 나무라지만 장관들을 닥달해도 시스템 자체가 잘 못돼 있어서 그들은 아무 일도 하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관광 사업은 가장 시급한 사업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급하고 쉬운 사업조차 제대로 될 수 가 없습니다. 제주도 도지사가 관광 프로젝트 하나를 추진하는 데에도 2-3년에 걸쳐 14개 장관의 허가를 득해야 했습니다.

14명의 장관이 뭉쳐야 하나의 관광 프로젝트를 수행할 수 있습니다. 14명의 장관 중에 누가 나서서 리더 노릇을 하겠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면 청와대에서 14명의 장관을 리드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 관광 산업이 육성되겠습니까?

지금은 일개 장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지금의 경제 난국을 푸는 데에는 수많은 프로젝트가 동원돼야 하며, 프로젝트 하나 하나에 여러 명의 장관이 동원돼야 합니다. 그런데 이들을 통합하하는 리더십 시스템이 없습니다. 그래서 말만 앞세우고 현실은 후퇴하고 있는 것입니다.

재경부 장관을 부총리로 격상시킨다고 이런 문제가 해결되나요? 시스템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 일을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이런 생각들을 합니다. 지위가 높아야, 인사권과 예산권을 가져야, 파워를 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합니다. 리더십이란 마음을 움직이는 능력이지 칼을 휘두르는 능력이 아닙니다.

짧은 시간에 대안을 모두 말씀 드릴 수 는 없지만 가장 기초가 되는 시스템 하나만 소개해 보겠습니다. 자금결제 기강 확립을 위한 시스템입니다.

한국 시장이 선진국 시장만큼 생산적이지 못한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신용 시스템의 낙후성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받을 돈을 제대로 받지 못한다면 누가 열심히 일하겠습니까? 한국에서의 신용은 개인의 덕목이나 도덕성에만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선진국에서의 신용은 시스템에 의해 강요받습니다. 선진국에서 개인이나 기업이 신용을 지키는 것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금방 법 집행 시스템에 의해 파산되기 때문입니다.

한국사회에 가장 시급히 요구되는 것은 신용 시스템입니다. 돈을 꾸고서도 갚지 않아도 버젓하게 살아갈 수 있고, 납품을 받고서도 어음 쪽지를 남발한 후 부도를 내도 솜방망이식 처벌만 받고 있는 것이 한국 사회입니다.

한국 사회에서도 갚아야 할 돈을 제때에 갚지 않을 수 없도록 경제 사범을 강력하게 처벌하고, 재판이 빠르고 공정하게 진행된다면 한국경제는 지금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만큼 번영할 것입니다. 만일에 한국 사회에 선진국의 신용 시스템을 그대로 가져다 적용한다 해도 한국사회의 신용은 금방 선진국으로 발 돋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1998년, 수도권에 있는 한 기업인이 60억 원을 들여 제조 설비를 갖췄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설비를 별로 써보지도 못하고 포크레인으로 찍어내 고철로 팔았습니다. 공장을 가동하면 전기료, 인건비, 재료비 들이 모두 현금으로 나갑니다. 그러나 제품을 만들어 납품을 하면 어음 쪽지만 받습니다. 그래서 그 공장 부지는 주차장으로 변했고, 그 주차장 수입은 적기는 하지만 온전한 현금 수입이 됐습니다.

그 지역 일대에 이러한 회사 수가 반을 넘습니다. 많은 실직자들 중에는 "그래도 한 번 뛰어보자"고 결심하는 이들이 많지만 그 결심들은 금방 시들어버리고 맙니다. "뛴다"는 것은 돈을 쓴다는 것입니다. 납품하기까지에는 많은 돈이 들지만 막상 납품을 하고 나면 어음 쪽지만 받습니다. 결론은 한가지 "가만히 있는 게 돈버는 길"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되면 누가 경제활동을 하겠습니까?

보도에 의하면 1998년도 한해에 50%의 자영업자들이 사업을 포기했다 합니다. 환전이 불가능한 어음쪽지, 끈질기게 질질 끌다가 떼어먹는 외상 매출 때문에 도산하고 있는 업체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미국에서처럼 남의 돈을 떼어먹을 수 없도록 엄격한 신용 시스템이 설치된다면 한국에는 그 즉시 일자리가 늘어날 것입니다. 반면 지금처럼 대금결제에 대한 기율을 확립하지 않으면 점점 더 많은 국민이 경제활동을 하지 않습니다.

첫 번째 원흉은 어음제도이고 두 번째 원흉은 돈을 갚지 않은 사람이 부자가 되어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있게 만들어진 허술한 법체계입니다.

어음제도가 있는 한 흑자 도산을 피할 수 없습니다. 기업인들이 경영에 신경을 쓰는 것이 아니라 돈 얻으러 다니는 데 신경을 쓰면 국가경쟁력이 자랄 수 없습니다. 돈을 받으려고 길바닥에 뿌리는 시간과 돈이 년간 20조를 넘을 것입니다. 중소기업의 자금난은 그림의 떡에 불과한 "육성자금"에 의해 풀려질 문제가 아닙니다. "온라인 자금결제를 의무화"하고, "결제 규율"을 확립해 주면 저절로 해결됩니다.

미국에서는 남의 돈을 떼어먹고서는 그 어느 곳에 가서도 살 수 없습니다. 일단 블랙 리스트에 오르면 그는 폐인이나 다름없이 살아가야 합니다. 취직조차 안 됩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어떤가요? 남의 돈을 갚지 않고도 부자가 되고 떳떳이 지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 모든 사람들이 줄 돈을 제 날짜에 척척 갚으려 하겠습니까?

작은 돈을 갚지 않는 기업이나 개인은 신고되자마자 판사의 법 집행 명령이 발동됩니다. 변호사가 필요 없이 판사가 마을회관에 나와 판결을 내주고 갚을 날짜를 지정해줍니다. 미국인들이 저절로 신용을 잘 지킨다면 미국에 왜 이런 시스템이 거미줄처럼 짜여져 있겠습니까?

게으른 사람은 응당 고통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열심히 뛰는 사람이 왜 고통을 받아야 합니까까? 건설분야의 자영업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재료비와 인건비를 현금으로 지급해가면서 훌륭한 제품을 설치해줬지만 거의가 다 외상입니다. 일부만 주고 나머지는 끈질기게 주지 않습니다.

어쩔 수 없이 일은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빚만 늘어갑니다. 그러는 동안 사회에 대한 불만이 쌓이게 됩니다. 빚을 갚지 않는 사람에 대해 신고만으로 판사가 명령을 내리고 법 집행을 강제해주는 단순한 재판 시스템이 미국에는 있는데 왜 한국엔 없는가요?

이렇게만 해주면 모든 기업이 살맛을 느낄 것입니다. "흑자 도산"도 없을 것입니다. 기업인이 운전자금을 위해 은행을 찾지 않을 것입니다. 옛날 동해백주가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습니다. 없어서 못 팔 지경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기업이 흑자 도산했습니다. 외상판매 때문이었습니다.

자금결제 기율이 확립되면 품질도 덩달아 향상됩니다. 중소기업이 자금난에 허덕이면 그 손해는 대기업으로 이전됩니다. 자금난으로 허덕이며 만든 부품의 품질이 훌륭해질 수 없으며, 그 부품으로 만든 대기업의 완제품 역시 훌륭해 질 수 없습니다.

바로 이런 게 우리에게 당장 필요한 시스템들입니다. 시스템을 보면 미래의 현상은 기다려보지 않아도 훤합니다. 현상은 시스템의 산물이니까요. 저는 시스템을 봅니다. 그래서 저는 사회를 예측할 수 있습니다.

1993년에 저는 "신바람이냐 시스템이냐"라는 책을 썼습니다. 거기서 저는 "지금의 30대 대기업은 10년 이내에 더 이상 대기업일 수 없다"고 예언했습니다. 불과 7년 만에 사실로 드러났습니다.

1997년7월에 "시스템 요법"을 썼습니다. "곧 대기업과 금융기관들이 동반 자살을 할 것이다"라고 예언했습니다. 5개월만에 IMF가 터졌습니다.

1998년2월에 "국가개조 35제"를 내놓았습니다. "현정부의 개혁은 경제 몰락을 가속시킬 것이다"라고 예언했습니다. 사실로 나타났습니다. 지금부터 몰락의 아픔이 이어질 것입니다. 경영 시스템에 관한 한, 몇 수만 보아도 미래가 예측됩니다.

지난 8월 5일 "한국호의 침몰"을 내놨습니다. "한국호는 이미 침몰하고 있다"는 경보 내용을 담았습니다. 국가를 위해, 제 진단이 틀리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시스템과학의 힘으로 저는 감히 예언합니다. 국가경영을 전혀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전환하지 않는 한, 우리 모두는 앞으로 10년 이상 엄청난 고통을 받게 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2000. 8. 26(토) 19시20분-19시54분

사회발전시스템연구소장, 지만원

2000. 8.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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