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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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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기조차도 싫은 펀다멘탈

기업은 덩치 크고 이윤이 많이 남는 상품들만 다뤄왔고, 중소기업들은 기존의 구식 제품에만 매달려 살았다. 그래서 한국시장에는 작고 아기자기한 상품들이 없다. 이러한 시장에 물밀 듯 들어오는 다양한 외국 제품들이 인기를 누리지 않을 수 없다. 들어오는 상품은 많고 내다 팔 상품은 별로 없으니 달러가 고갈돼 갈 수 밖에 없지 않는가.

현재의 기술로도 아이디어만 짜내면 다양하고 고급스런 상품을 개발할 수 있지만 한국의 낙후된 "시장경제 시스템"과 "파행적 기업문화"를 가지고는 그러한 노력이 유도될 수 없었다. 파행적 폭리에 길들여진 기업들은 다시 3공 이전에 그랬던 것 처럼 무기력해져가고 있다.

우리의 대기업이라고 해봐야 미국이나 일본에서 기술을 주도하고 있는 조그만 중소기업으로부터 OEM 하청을 받아 납품하는 정도에 불과했다. 이렇듯 한심한 처지를 부끄럽게 생각하기는 커녕 대기업은 당장 에 떼돈을 벌 수 있는 장사거리에만 눈이 어두워 기술에는 투자하지 않았다. 무엇을 개발하고 무슨 업종을 개발할 것인가를 연구하지 않고, 무엇이 잘 팔리고 있는가에 후각을 곤두세웠다.

남들이 특정 제품으로 떼돈을 벌 때마다 거기에 뛰어들어 출혈경쟁을 자행했다. 어찌 중복투자 현상이 나타나지 않겠는가. 이 한심한 현상은 천민자본가에 불과한 한국 재벌 총수들의 철학 부재가 불러왔다. 수많은 사장들을 고용한 재벌총수들은 단 한가지 "이윤의 크기"로 사장들의 업적을 평가했다.

이윤은 매출액에서 비용을 뺀 것이다. 기업의 도리를 지켜가면서 정상적인 방법으로 1년 이내에 매출액을 올리고 비용을 절약한다는 것은 이들에게 불가능해 보였다. 파행에 대한 유혹이 어찌 생기지 않겠는가. 바로 여기에 파행을 차단하는 시스템이 필요한 것이다.

미국의 시장경제 시스템은 파행에 대한 유혹 자체를 차단하고 있지만 한국의 낙후된 시스템에서는 이러한 파행이 오히려 조장돼 왔다. 미국의 시장경제 시스템 속에서는 낡은 기술, 낡은 경영을 가지고는 단 하루도 견디지 못한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그것을 가지고도 얼마든지 떼돈을 벌 수 있었다. 그런데 구태어 기술개발을 위해 돈을 쓰고, 과학경영을 위해 면학할 필요가 어디 있었겠는가.

한국적 파행의 제1 주범은 정부다. 정치인들과 공무원들이 정경유착을 유혹해 기업으로부터 검은돈을 챙겼고, 세리들은 검은돈을 받고 세금을 깎아 주었다. 일단 파행 길에 들어선 기업들은 서서히 기업정신과 창의력을 잃어갔다.

틈만 나면 오페수를 몰래 방류할 수 있는 경영자들이 어찌 그 비싼 기술두뇌를 고용할 것이며, 비싼 실험장비를 살 수 있겠는가. 공무원들과 기업이 서로 얽혀 바람이 나 있는 동안 기업이 만들던 기존 상품들은 점점 더 빨리 사양화돼 갔다. 새로운 상품은 나오지 않고 기존 상품은 사양화되니 실업자가 늘어날 수 밖에 더 있겠는가.

한국경영의 퇴화과정을 보자. 선진국 기업은 오래전부터 국제시장에서 경쟁해왔다. 그들에게 제품가격은 시장이 정해주는 가격이었다. 시장가격이 100달러이면 90달러에 도전했다. 90달러를 맞추기위해 그들은 제품설계와 공정설계를 개선하고 경영혁신을 주도했다. 이를 그들은 DTC(Design To Cost)라 했다. 목표 원가에 설계를 맞춘다는 뜻이다. 과학적인 경영은 이렇게 해서 몸에 뱄다.

그러나 한국 기업은 제품가격을 그들 마음대로 정했다. 아무리 국제가격이 100달러라 하더라도 한국 기업은 "비용이 많이 들었기 때문에 1,000달러는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독점가격은 정부의 보호와 유착 아래 기승을 부렸다. 이 때가 대기업에게는 황금시절이었다. 대기업이 국민을 마음껏 착취할 수 있었던 호시절이었던 것이다.

어느날 갑자기 WTO라는 강풍이 보호막을 날려버리자 100달러 짜리 수입품들이 물믿듯 들어왔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경제위기는 한국기업이 외국기업에 첫 라운드에서 KO패 당하고 있는 모습인 것이다. 손끝기술과 파행경영이 선진국의 두뇌기술과 과학경영을 어찌 당해낸단 말인가. 이를 가지고 우리 경제학자들은 "경제기초( fundamental)가 튼튼하다"고 표현했다.

2000. 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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