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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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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평가 시스템

한 나라의 산업은 시험평가 능력만큼만 자란다. 시험평가할 수 없는 제품의 품질을 누가 믿고 사겠는가? 누구나 한결같이 새 제품을 개발하는 것만이 살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중소기업이 신제품을 개발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선진국과는 달리 한국의 중소기업은 자본이 열악하고 고급 인력을 고용할 수 없다.

대부분 기술고등학교 출신들이다. 선진국에서 새로 나온 기술 제품의 팜플렛을 해독할 인력조차 없다. 그런데 어떻게 이들이 새로운 기술을 만들어 낼 수 있겠는가? 이들에겐 자금이 필요한 게 아니라 기술 정보를 제공받고 기술 내용을 지도 받을 수 있는 사회적 인프라가 더 간절하게 필요한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이들이 설사 새로운 제품을 만들었다 해도 이를 시험평가 해줄 수 있는 기관이 한국에는 없다. 그래서 신제품을 개발해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고 그래서 사주는 사람이 없다. 팔 수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 누가 돈들이고 땀흘려 신제품을 개발하려 할 것인가. 따라서 한 나라의 기술은 시험 평가 능력만큼만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시험평가에 대한 인프라 없이는 개발도 없고, 판매도 없다.

신제품을 만든 사람들이 정부나 대기업 등에 신제품을 소개하려고 방문하면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당신을 어떻게 믿고 신제품을 사느냐, 공신력 있는 평가기관에서 평가받은 것이 있느냐"는 것이다. 선진국과 후진국이 다른 점은 정부가 이러한 현상을 타파하기 위한 시스템을 만들어주고 있느냐 없느냐에 있다.

선진국에는 공신력 있는 시험평가 기관이 있어서 모든 신제품에 대해 시험평가 서비스를 제공한다. 신제품에 대한 성능 및 디자인의 특성을 분석해 "월간정보지"에 실어 업체와 단체에 배부한다. 그 신제품 정보를 입수한 고객들은 신제품을 믿고 구매한다. 판촉을 할 때에도 상품 번호만 대주면 신상품의 신뢰성이 입증된다.

미국, 일본 등을 위시한 선진국에서의 중소기업은 독자 기술을 가지고 있는 산업의 기초 인프라이지만 한국 중소기업의 60%는 조악품을 만들거나 대기업과 유착하여 특정 부품을 납품하는 종속 기업으로 역할 해왔다. 이들 납품업체들은 재벌이 주는 납품권을 따 가지고 그 품목을 제작할 수 있는 설비를 통 채로 들여와 오래도록 그 제품만 제작하여 납품해 왔다.

어쩌다 외국 제품을 대신할 수 있는 부품이 국내에서 개발돼도 대기업들은 품질을 믿을 수 없다는 이유로 이를 외면한다. 대기업은 눈에 보이는 확실한 열매만 따먹으려 하고 나무를 심는 데에는 관심이 없다. 더러는 대기업들의 이러한 행태를 비난하지만 이는 비난만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다. 정부의 역할이 필요한 것이다.

개발품에 대한 성능을 평가한다는 것은 엄청난 과학도들과 시스템공학 전문가들 그리고 방대한 실험 장비를 요한다. 이는 엄청난 투자를 요하지만 그 투자비는 수천-수만 배의 황금알을 낳는 거위다. 통상의 당국자들에겐 황금알은 안보이고, 당장 들어가는 투자비만 크게 부각돼 보인다. 바로 이것이 한국이 선진국을 따라가지 못하는 커다란 병목 현상 중의 하나다.

우리가 지금 차량에 장착하고 다니는 ABS 브레이크는 만도기계에서 나온 기계식이다. 몇 사람의 기술자들이 모여 전자식 ABS 브레이크를 만들었지만 거들떠보는 사람이 없었다. 이 브레이크 성능을 증명해줄 수 있는 기관은 한국에 없다. 그들은 일본이나 미국에 알아보았지만 정보도 없고 돈도 넉넉하지 못해 판매를 포기하고 말았다. 이렇게 빛을 보지 못한 개발품은 수없이 많다. 이와 같이 제품 개발은 개인들이 노력만 한다고 해서 이뤄지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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