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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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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O 9000 의 역사

영국에서 지브러기(Zeebrugge)호로 명명된 페리호가 손님을 가득 싣고 문을 채 닫기도 전에 빠른 속도로 커브를 틀다가 많은 인명을 절단냈다. 검찰이 누가 범인지를 찾아내려 했지만 딱 부러지게 어느 한 사람의 잘못이라고 단정할 수 없었다. 문 단속을 책임진 직원은 그날 승선인들이 원체 많아 이리저리 바쁘게 뛰어다니다 보니 정작 배가 출발할 때에는 정위치에 없었다.

그는 선장이 평소에 비해 너무나 많았던 당시의 승객 수를 고려해 좀 늦게 출발할 줄 알았다고 항변했다. 선장에게 죄를 물으려니 선장은 원칙에 따라 정시에 출발했다고 항변했다.

사고는 났지만 죄는 아무에게도 물을 수 없었다. 아마도 한국 같으면 힘없고 백없는 담당자에게 죄를 씌우고 얼마 후 국민의 관심이 사라질 때에 슬며시 풀어주고 말았을 것이다.

여객기 추락사, 성수대교 붕괴, 삼품 참사 등 수많은 사고를 당하고도 우리는 이에 대한 근본 대책은 세우려 하지 않고 하위직 공무원 몇 사람들만 가두었다가 슬며시 풀어주곤 했다. 그러나 영국 정부는 달랐다. 죄는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 부재에 있었다는 결론을 얻었다.

선장과 문단속 요원간에 의사를 전달하는 통신 기기도 없었고, 출발전에 체크해야할 업무 절차도 마련돼 있지 않았다. 그후 20년이 지난 후 한국 위도에서도 똑같은 종류의 사고가 났다. 위도를 출발한 페리호가 침몰돼 수백명의 생명을 절단냈다. 물론 이 사고 역시 안전 시스템의 부재로 인해 발생했다.

모든 언론 매체들이 난리를 쳤지만 시간이 지나자 대통령은 그 사고를 뼈를 깍는 아픔이었다고만 발표한후 사실상 없었던 일로 치부해 버렸다. 그후 달라진 것은 없고, 결국 한국인들은 값비싼 사고로부터 아무 것도 배우지 못했다.

영국 정부는 이 페리호 사고를 계기로 시스템 운동을 전개했다. 공공성을 지닌 병원, 학교, 수송, 기업, 백화점, 호텔 등 모든 조직에 최소한의 안전과 품질을 보장할 수 있는 시스템의 설치를 강요했다. 이것이 바로 영국표준(BS5750)이었고 이는 다시 국제표준인 ISO 9000 시리즈로 채택됐다.

제품과 서비스는 시스템의 산물이다. "사고를 줄여라", "의식을 개혁하라", 정신 좀 차려라", "상품과 서비스의 품질을 높혀라"하고 외칠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도록 시스템을 갖추라는 것이다. 공공성을 갖는 모든 조직이 이러한 시스템을 갖추었는지 아닌지를 평가하기 위한 것이 바로 시스템에 대한 국제표준 ISO 9000시리즈다. 그래서 유럽에서는 ISO 9000 인증을 받지 못한 기업이 만든 제품은 사주지 않는다.

상품은 기업 시스템의 산물이다. 모든 사회현상도 시스템의 산물이다. 따라서 시스템을 보면 산물은 안봐도 안다. 만일 한국의 경제 정책 담당자들이 20년전에 시스템을 읽을 줄 알았더라면 오늘날의 경제 붕괴 현상은 예방됐을 것이다.

2001. 3.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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