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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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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만 믿네, 이것이 한국식 경영이다

50줄에 접어든 외아들이 부친의 사망으로 기업을 떠맡게 됐다. 평소 부친의 사업에 무관심했던 터라 기업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는 대기업에서 중역으로 있던 친구에게 "자네만 믿네"하면서 기업을 맡겼다. 불과 3년만에 모든 재산은 그 친구에게 넘어가고 알거지가 됐다.

은행 지점장에게 1억 원을 빌려준 점잖은 부자가 지점장의 서류조작으로 돈을 떼이게 됐다. 기가 막힌 부자는 호언장담하던 변호사에게 사건을 맡기고 "알아서 잘 해달라"고 부탁했다. 대법원 판결이 날 때까지 변호사는 혼자 "알아서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변호사는 피고 측으로부터 더 많은 돈을 받고 송사에 일부러 패했다.

몇 명의 간호원을 데리고 가내 수공업식으로 병원을 경영하는 치과의사가 웬만한 기록은 모두 간호원에게 맡겼다. 오래 맡기다 보니 하루에 100명을 치료했는데 기록은 80명이다.

대기업에서 고위급 임원을 지낸 사람을 스카웃 하여 독립공장을 맡겼지만 그는 찬바람을 일으켜 직원들을 얼어붙게 하면서 각종 거래에 관여하면서 사복을 채웠다. 이러한 사람들일수록 컨설턴트 조사에 지능적으로 저항한다. 심복 부장에게 많은 권한을 주었더니 거래를 불투명하게 하고 상급자의 약점을 조사하여 훗날 있을지 모르는 자기 방어 준비에 열중했다. 상사의 총애를 등에 업고 설치면서 많은 직원들의 마음을 회사와 상사로부터 돌려세웠다.

큰 사업에서 작은 행정에 이르기까지 남에게 일을 맡긴다는 것은 그 자체로 모험(risk)이다. 그 모험을 스스로 관리할 능력이 없을 때에는 돈을 들여서 감시 시스템
을 만들어야 한다. 선진국 감사(audit) 교과서의 첫머리에는 "부정은 심복으로부터"
라는 경구가 있다. 사람을 믿지 말고 시스템을 믿으라는 것이다.

시스템은 모든 인간이 사악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설계된다. 견제와 균형의 시스템이다. 견제와 균형 시스템을 가지고는 자산의 유실은 예방할 수 있어도 발전은 기할 수 없다. 바로 시스템 개념에 익숙한 전문경영인의 리더십이다.

그런데 한국 대부분의 기업에는 상명하달과 편법에 익숙한 "편법에 서식하는 원주민"들만 있고 합리적 시스템을 만들거나 합리적인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경영인들이 없다. 나 역시 수많은 기업들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기 전까지는 기업체 간부들이 상당한 경영지식을 가지고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알고 보니 이들은 공무원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경영지식이 더 있는 것도 아니고 도덕적으로 더 강한 것도 아니었다.

전형적인 음식점의 지배인이 일하는 모습을 살펴보자. 어쩌다 주인이 나타나면 굽실거리고 발라 맞추기 때문에 점잖은 주인은 이것저것 물어보기를 꺼려한다. 주인이 가고 나면 지배인의 얼굴에는 권위가 철철 넘친다. 모든 종업원들은 지배인의 눈에 잘 보이는 것을 최고의 처세로 생각한다. 지배인에게 중요한 것은 자기의 권위이지 고객 제1주의가 아니다. 보이지 않는 사이에 식당은 망해 가고 지배인만 점점 더 부자가 되는 것이다.

나는 제조, 건설, 유통, 서비스 업체들을 관찰하고 진단하면서 우리 나라의 거의 모든 기업이 위의 요식 업소의 경영실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결론을 얻었다. 우리 나라 기업문화를 가지고는 "절대로" 경쟁력을 가질 수도 없으며, 훌륭한 경영진을 양성할 수도 없다.

"자네만 믿네" 거의 모든 한국 간부들의 근무자세다. 이와는 정반대로 미국인 간부는 아래 사람들보다 더 많은 일을 한다. 농구의 주장선수처럼 자기도 뛰면서 아래 사람들에게 일을 배분해 준다. 이런 미국 간부와 한국 간부의 생산성은 어떻게 다를까. 미국 간부들은 자동차를 몰면서도 일하지만 한국 간부들은 앉아서 일감만 던져준다.

훌륭한 지휘자는 새로운 프로젝트를 맡으면 자기가 먼저 나서서 프로젝트의 규모, 성격, 범위, 내용을 샅샅이 파악하여 업무진행 방법에 대한 윤곽을 짠다. 그의 관찰력이 팀원들보다 낫기 때문이다. 그 다음은 자유로운 농담 분위기를 만들어 가면서 여러 날 동안 토의를 주재하여 업무를 분해-분석하여 수행전략을 이끌어 낸다. 건축에 설계가 좋아야 하듯이 일에도 설계가 좋아야 한다. 바로 위와 같은 접근방법이 일의 설계(design of work)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일을 설계하는 위의 과정을 생략한다. 서둘러 움직이기부터 하기 때문에 언제나 시행착오가 발생한다. 외국에 나가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외국 건설 업체와 한국 건설 업체가 나란히 같은 규모의 건물을 지었다. 한국인들은 수주 다음날부터 인부를 투입하며 활발하게 움직였다. 하지만 외국업체는 한 달이 가도 사람 하나 나타나지 않았다.

한국인들이 시행착오를 범하고 있는 동안 외국인들은 늦게 인부를 투입했지만 한국인보다 12개월 중 두 달이나 일찍 일을 끝냈다. 한국인들은 인부를 놀리면서 12개월간 일당을 주었지만 외국인들은 계획적으로 일했기 때문에 8개월 분의 일당만 내주었다. 공기와 원가에 게임이 되지 않았다. "일의 설계"가 이만큼 중요한 것이다.직위상 일의 설계는 간부가 주도해야 하지만 간부들에겐 이런 능력이 전혀 없다. 똑똑한 과장 한 사람만 믿는 것이다.

경기 악화로 인해 최근에는 새 건물을 짓는 것보다 헌 건물을 개축해서 사용하려는 기업들이 늘어나고 있다. 헌 건물을 개축하는 renovation(remodeling) 작업은 신축 작업에 비해 상당한 경영능력과 기술적 판단을 요한다. 미국 간부는 스스로 랜턴을 들고 천장 속을 누비며 소형 녹음기에 메모를 해다 밤에 정리한다. 일의 양을 판단하여 사람을 채용하고, 외부 능력을 적절히 활용하며, 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통신으로 지휘한다.

하지만 한국 간부 중에 이런 사람은 거의 없다. 전무는 부장에게 지시하고, 부장은 과장에게, 다시 과장은 대리에게 지시한다. 결국 천장 속에 올라가 설비들이 얼마나 낡았는지, 갈라진 금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도 모르면서 결재 서류를 작성해 과장에게 올린다. 과장은 부장에게, 부장은 전무에게 결재를 얻는다. 미국 회사는 부사장 급의 관찰과 판단으로 일을 하지만 한국 회사는 대리 급 사원의 관찰력과 판단으로 일을 한다. 미국 회사는 부사장 급 아이디어를 사장에까지 관철하는 데 1일이면 족하지만, 한국 회사는 대리 급 수준의 아이디어를 관철하는 데 한 달씩이나 소비한다.

미국 간부들은 경영과 기술, 마케팅, 인사관리를 고급 간부 한 사람이 모두 하지만 한국간부는 한가지 일, 간단한 일도 밑에다 던진다. 설상가상으로 권위와 경험을 내세우며 실무자들의 시간을 쓸 데 없이 빼앗고 있다. 기업의 최고경영자들은 이런 간부들에게 둘러싸여 "자네만 믿고" 있다가 내장에 암을 키워가고 있는 것이다. 한국 기업이 선진 기업에 맥을 추지 못하고 쓰러지는 이유는 "자네만 믿는 간부들" 때문이다.

2001. 12.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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