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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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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 단위의 시스템 구축

은행은 지점들의 집합체다. 모든 지점장들은 천편일률적인 구시대 조직을 가지고 판에 박힌 듯이 똑같은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현 지점장들의 능력으로 수행할 수 있는 일은 겨우 소매 창구를 운영하는 일 뿐이다. 이런 능력 밖에 가지지 못한 지점장들에게 고객의 신용과 능력 평가를 전제로 하는 대출 및 대부 업무를 맡기고 있기 때문에 부실대출이 속출해온 것이다.

부정은 심복으로부터 나온다. 따라서 부정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심복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시스템이 필요하다. 시스템이 빈약하고 허술하기 때문에 지점장은 대리 급 심복 한 사람만 거느리면 얼마든지 대출 부정을 저지를 수 있다. 시스템이 빈약하기 때문에 정치권과 권부의 대출압력이 쉽게 먹혀들 수 있다. 은행들을 국유화했기 때문에 관치인사, 관치금융, 파워 대출의 악습들이 더욱 더 심화되고 있다. 정치권의 도덕적 해이는 곧바로 은행인들의 도덕적 해이로 연결되고 있다.

은행의 각 지점을 들여다보자. 대출과 대부에 할당된 인력은 팀당 2명으로 구성된 3개 팀뿐이다. 그 2명에도 상하관계로 구성돼 있다. 3개 팀을 1명의 부장이 통할하고 있다. 그 위에 지점장이 있다. 2명으로 구성된 팀 마저도 팀장과 팀원으로 구성돼 있어 대출에 관련한 수많은 조사를 주도하고 고려사항을 종합적으로 분석하여 대출 여부와 대출 규모를 결정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팀의 능력이 취약하기 때문에 지점장 일인 독재가 가능하다. 더구나 대출해준 돈에 대한 사후관리에 대한 대책은 전혀 없다. 그럴 능력도 없고, 인력도 없다. 대출 및 대부 업무와 사후관리 업무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지점을 차별화해야 한다. 대출 및 대부 업무만을 다루는 대출 전문 지점과 소매 금융을 위한 수신 및 창구 업무만을 관장하는 일반 소매 지점으로 분리 하여 지점을 차별 화시키는 방법이 강구돼야 한다. 즉 소매금융, 기업금융, 국제금융으로 특화 된 지점들이 필요하다.

일반 소매 지점은 지금처럼 고객들의 편리를 위해 지역마다 설치하지만, 대출 전문 지점은 인력 규모 상 넓은 지역 단위에 하나씩 드문드문 둘 수 밖에 없다. 대출을 받으려는 고객에게는 은행과의 거리가 문제가 아니라 서비스의 질이 중요하다.

대출 전문 지점 내의 인력은 고급 분석 능력을 갖춰야 하며 이들은 팀제로 운영돼야 한다. 팀에게는 시장을 쪼개 나눠줘야 한다. 시장은 지역적으로 나눌 수도 있고, 고객 기업군 단위로 나눌 수도 있다. 대출은 팀 단위의 실명제 하에 이뤄져야 하고 대출된 돈은 책임지고 사후 관리 돼야 한다.

팀 단위로 책임 대출과 사후 관리를 하게 하는 이상 지점장은 대출 업무에서 완전히 제외돼야 한다. 개별 기업에 대한 의사결정에서는 더욱 철저하게 배제돼야 한다. 지점장은 대출업무의 고리에서 완전히 벗어나 팀들의 대출업무에 대한 감사자가 돼야 한다.

지점장의 리더십은 팀들의 경영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교육, 시스템 개선, 복지 문제에 지향돼야 한다. 성과는 지점장이 평가하지만 인사권은 지점장에게 주어지지 말아야 한다. 지점장의 인사권은 팀원들의 독립성을 파괴하고 지점장의 막후 영향력 행사를 가능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인사권이 있어야 사람을 부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절대로 훌륭한 경영을 할 수 없다. 한국경영이 과학화되지 못하고 부정과 비리가 만연해온 것은 직속상관 개인에게 주어진 인사권 때문일 수 있다. 가장 훌륭한 리더는 무관의 리더다. 인사권과 직위가 없어도 사람을 부릴 줄 아는 리더다. 시스템과 논리만 훌륭하면 사람들은 따르게 돼 있다. 인사권을 개인이 가지고 있으면 그 개인도 타락하고 부하들도 타락한다.

대출에 대한 모든 의사결정은 적어도 5명 이상으로 구성된 팀원들에 의한 현장 조사와 팀원간의 열띤 토의에 의해 만장 일치로 이뤄져야 한다. 팀간의 치열한 경쟁이 유도돼야 한다. 그러면 부정과 야합이 없어지고, 부실대출 가능성이 줄어들며, 대출 업무의 신속성과 정확성 그리고 전문성이 길러진다. 간부들의 무사안일주의도 있을 수 없게 된다.

반면 일반지점 내의 인력은 단순 업무에 치중하기 때문에 인력도 지금의 반 이하로 축소돼야 할 것이다. 단순한 업무만을 취급하기 때문에 지점장의 직급도 지금보다 낮고 다른 간부들의 직위와 숫자도 지금보다 하향 조정돼야 할 것이다.

관치 금융의 폐해와 은행 경영의 합리화를 보장하기 위한 또 하나의 시스템은 15명 내외로 구성된 감시 위원회다. 은행에 마다 15명 내외의 공신력 있는 사계의 독립적인 인사를 선발해 감시위원회를 구성하는 것이다. 이 15명이라는 숫자는 야합할 수 없는 다수다.

그런 위원회를 은행에 마다 설치하면 금융문제는 즉시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은행장도 이들 15명의 감시위원회가 선발한다. 이들에 의해 선발된 은행장은 정치권의 간섭을 받을 필요가 없다. 설사 받았다 해도 은행장의 독단은 통하지 않는다. 15명의 감시위원회의 의결을 거쳐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매년 의무적으로 외부 경영 분석팀을 고용해 은행의 경영상태를 분석한 다음 이에 따라 인사를 단행한다. 이렇게 하는데 어찌 은행이 발전되지 않겠는가? 바로 이것이 관치금융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길이다.

2,000년 1월 금융감독원이 각 은행의 경영진을 상대로 한 설문 조사에서는 이사회의 기여도가 낮은 이사 수가 47%인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러나 그 기여도라는 것도 평가하는 사람들의 수준에 달려있다. 나머지 53%의 이사라고 해서 선진국 수준의 이사 역할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은행들의 가장 취약한 점은 개인과 기업에 대한 신용 정보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은행들은 담보를 잡고 그것도 모자라 보증인을 세운다. 이러한 식의 땅 짚고 헤엄치는 식의 대출은 장기적으로 은행의 능력을 고사시킨다.

친척들이나 동료들이 빚 보증을 서달라고 조른다. 보증을 서주면 빚을 갚을 때까지 마음고생을 해야하고, 서주지 않으면 관계악화는 물론 보복까지 당한다. 빚 보증 때문에 가정이 파괴되고, 심지어는 온 가족이 집단 자살하는 끔찍한 일도 있다. 친구에게 서준 빚보증 때문에 퇴직금도 차압당하고 잠적해 다니는 기막힌 사연들도 있다. 얼마나 많은 국민들이 이런 고통에 시달리고 있을까? 빚 보증 제가 없어지면 이러한 고통도 없어진다. 최근 은행들이 빚 보증 한도액을 1,000만원으로 제한하고는 있지만 이 역시 미봉책일 뿐이다. 대출은 본인 자신의 신용에 의해서만 이뤄져야 한다.

미국인들은 자기 신용으로만 살아간다. 그러면 개인 신용은 어떻게 파악되는가? 개인별 기록에 의해 파악된다. 수입, 세금, 거래량에 대한 기록들이다. 미국에서는 누구나 현금 사용을 기피하고 카드를 사용하려 든다. 카드를 사용해야만 거래액이 기록되고, 그 거래액이 바로 신용을 축적하기 때문이다. 은행에서는 이렇게 기록된 개인의 신용정보를 가지고 대출 조건을 결정한다.

기업의 거래량은 가장 훌륭한 "살아 움직이는" 신용자료다. 거래량을 신용으로 활용하면 기업 역시 은행지로를 통해 실명으로 결제하려 들 것이다. 한국에서 더 시급한 제도는 금융실명제가 아니라 거래실명제였다. 그랬어야 신용사회 건설이 앞당겨 졌을 것이다.

2000. 5. 21 재검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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