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

View Articles

Name


	지만원

Subject

기업 단위 시스템

모든 경영 주체들에게 3대 시장경제 원칙들을 준수할 수밖에 없도록 하는 시스템은 어떤 시스템일까?

첫째, 기업단위 하나 하나에 세 개의 독립적 객체를 형성해야 한다. 주주진, 경영진, 공인회계법인체다. 이들 3개 객체는 독립적이며 견제와 균형이라는 유기적 연관관계를 가지고, 권력기관의 간섭 없이, 자기들끼리 치고 받으면서 기업의 건전성을 지켜 나가야 한다.

돈을 투자한 주주들은 그들의 재산을 경영해줄 경영진의 능력과 양심에 대해 염려할 수밖에 없다. 첫째, 경영진들에게 정말로 훌륭한 경영능력이 있는지 둘째, 분식회계를 통해 적자를 내고도 흑자를 냈다고 꾸미지 않는지 셋째, 회사 재산을 훔쳐내지 않는지에 대해 노심초사할 것이다.

그래서 주주진은 많은 돈을 주고서라도 경영진들의 경영능력과 양심을 감시해줄 수 있는 전문 공인회계사를 고용하려 할 것이다. 바로 이것이 견제와 균형을 위한 기본적인 기업 시스템이다. 그러나 한국 기업에겐 이러한 시스템이 없다.

가장 상징적인 한국 재벌을 보자. 재벌 회장 한사람이 수많은 소액 주주들을 배제시키고 혼자서 황제 식 경영을 하고 있다. 주주진도 따로 없고, 경영진도 따로 없고, 공인회계사도 따로 없다. 재벌 회장이 마음에 드는 경영자들을 선발하고, 마음에 드는 공인회계사를 고용하고 있다.

재벌 회장 한사람이 혼자서 수십 개의 기업단을 거느리고 과학적 분석과정 없이 독단적으로 경영을 주도하고 있기 때문에 경영진과 주주진 간에 있어야 할 견제 기능이 존재하지 않는다. 혼자서 의사결정을 하고 그래서 생긴 적자를 흑자를 낸 것으로 둔갑시켜 가면서 주식 가격을 올려 가며 거기에서 생긴 차액을 사유재산으로 챙겨왔다. 은행돈을 끌어다가 개인 용도로 탕진했다. 이는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왜곡된 시장 시스템이다.

둘째, 기업단위당 주주진에는 2명 이상의 가족이 들어 있어서는 안된다. 한개 회사의 주식을 여러 명의 가족이 보유하면 족벌체제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기업 단위의 주주진은 남남으로만 구성돼야 한다. 이러한 룰이 적용되면 지금의 재벌 회장은 주주진을 구성하는 수많은 주주들 가운데 한 사람에 불과하게 된다. 바로 이런 것이 자본의 민주화다.

셋째, 주주진은 경영진을 선발하고, 경영진을 감시할 공인회계법인체를 선정해야 한다. 지금 처럼 재벌 총수 혼자서 주인 행세를 하고, 최고 경영자의 역할까지 담당하게 하고, 공인회계사를 마치 하수인 처럼 고용하게 하는 환경 하에서라면 기업의 민주화나 합리화는 있을 수 없다.

한 사람의 재벌 독재자는 수십 명의 사장들을 선발할 때 능력보다는 자기에게 충성할 사람들을 뽑게 된다. 시스템 적으로 보면 재벌이 고용하는 경영능력이란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하기 위한 창의력이 아니라 일종의 컨닝 능력일 수 있다.

그러나 주주진이 다수의 타인들로만 구성돼 있으면 머슴이 아니라 유능한 경영인들을 뽑을 수밖에 없다. 그 많은 주주들이 서로 자기 사람을 경영진에 집어넣겠다고 하면 기업은 아수라장이 될 것이다. 만일에 주주들이 공인회계사들의 전문적인 영역을 이해하지 못하여 공인회계진과 경영진이 서로 야합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여기에 소위 사외이사들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다. 주주진들은 자기들을 대신해서 경영진과 공인회계진의 야합을 감시할 수 있는 15명 내외의 사외 신탁자들을 유치할 필요가 있다. 이들은 경영자들에 대한 인사도 제안할 수 있고, 중요한 의사결정에 자문 역할을 수행하기도 하며, 중요한 거래에 대해 제3의 조사기관을 고용하여 샘플 조사를 시킬 수도 있고, 기업회계 시스템을 보다 발전시키기 위해 또 다른 공인회계진을 고용할 수도 있다.

지금 한국에서는 대기업 총수들의 전횡을 예방하기 위해 사외 이사제를 거론하고 있지만 총수들은 만만한 사람들만 사외이사로 임용해 왔다. 한국에서의 사외이사는 단지 모양만 그럴 듯 하게 꾸민 통과의례에 불과하다. 재벌 총수의 마음에 드는 사람들로만 뽑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는 소액주주들을 향해 권리를 스스로 신장하라고 말하지만 소액주주들은 조직력이 없어 총수들이 동원한 물리력에 의해 회의장에조차 참석하지 못한다.

또한 이들에게는 정보도 없고, 분석능력도 없다. 개인 한사람 한사람이 획득할 수 있는 정보는 그리 많을 수 없으며, 개인들의 분석능력에는 언제나 한계가 있다. 사회적 영향력이 있는 15명 내외의 독립적인 인사들을 유치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넷째, 기업재무제표에 하자가 발생했을 때에는 공인회계사에게 일생을 담보할만한 가혹한 처벌을 내리도록 법을 제정해야 한다. 주식을 사는 사람들은 공인회계사의 서명만을 믿고 재무제표를 신뢰하기 때문이다. 공인회계사의 신뢰성이 붕괴되면 시장경제도 붕괴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보자. 부친으로부터 사업체를 물려받은 사람이 갑자기 사장으로 앉게 됐다. 그는 사업에 대해 별로 아는 게 없어 여러 기업에서 경험을 쌓은 친구에게 전무직을 맡겼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믿었던 전무는 부자가 됐고 사장은 알거지가 됐다. "눈먼 기업주"의 돈을 전무가 빼돌린 것이다.

바로 여기에 전무의 비리를 감시할 수 있는 공인회계 시스템이 필요한 것이다. 만일 사장이 충분한 수임료로 공인회계사를 고용하고 그 공인회계사를 감시하기 위한 사외이사를 고용했더라면 그의 재산은 보존될 수 있었고 기업도 성장했을 것이다. 기업에게 있어 공인회계사와 사외이사야 말로 가장 확실한 보험 수단인 것이다.

다섯째, 공인회계사의 수임료는 지금처럼 "건당 얼마"라는 식의 형식적 "정액제"가 아니라, 리스크에 따라 자유롭게 협상돼야 한다. 리스크가 높다는 것은 기업의 회계시스템이 엉성하여 신뢰성 있는 재무제표가 작성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회계자료는 회계시스템의 산물이다. 따라서 공인회계사는 지금처럼 기업이 만들어낸 자료만 가지고 계산이 잘됐나 못됐나를 점검할 것이 아니라 연간 내내 기업의 회계시스템의 신뢰성을 감사해야 한다. 엉성한 회계 시스템이 만들어낸 자료는 보나마나 신뢰성이 없기 때문이다.

공인회계사에게는 변명이 있을 수 없다. "기업이 나를 속였다"라고 말하는 공인회계사는 즉시 퇴출 돼야 한다. 프로와 리더는 무한 책임을 진다. 공인회계사는 프로중의 프로다. 무한 책임을 지기 때문에 회계 시스템의 신뢰성이 낮은 회사에 대해서는 밀착 감시를 해야 하고 그에 따라 수임료는 기업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높아져야 한다.

이상은 무질서가 판치는 황야에 하루라도 빨리 설치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시스템이다. 일일이 대뇌에서 명령을 내리지 않더라도 장기 상호간의 견제와 균형의 논리에 의해 인체의 건강이 스스로 유지돼 나가듯이 기업의 장기 상호간에도 균제와 균형이 작동해야 한다. 기업 시스템을 이상과 같이 설치해 놓으면 정부가 일일이 간섭하지 않더라도 기업의 건강과 투명성이 날로 발전할 것이다.

2000. 5. 21 재검토


Prev	은행 단위의 시스템 구축	지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