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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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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식 회의

어느 정부산하 연구소에서 미국에 있는 학자를 유치했다. 그에게 호봉을 주기 위해 8명의 중진 학자들이 회의를 했다. 연구호봉이라는 것은 연구자들간의 서열과 봉급액수를 정하는 일종의 계급과 같은 것이었다. 그에게 너무 상대적으로 낮은 호봉을 부여하면 그는 근무하는 동안 내내 언잖아해 할 것이며 그에게 상대적으로 높은 호봉을 부여하면 기존의 연구원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것이었다.

인사과에서 표준 점수산정 규정에 따라 호봉점수를 계산해 심사관들에게 돌렸다. 점수는 7.2호봉이었다. 회의를 주재하는 선임자가 심사관들을 둘러보았다. "다들 인사과의 점수산정결과를 받으셨지요? 그럼 오른 쪽에 앉은 분부터 말씀해 보시지요".

첫 번째 심사관은 사사오입 개념에 의해 7호봉을 주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그 다음 사람부터는 자동적이었다. 모두가 "그게 좋겠습니다"(me too)라고 말했다. 마지막에 앉았던 사람이 맨 먼저 번 사람에게 물었다. "왜 7호봉이라고 생각하셨습니까?". 그는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 다음의 모든 사람들도 왜 7호봉인지에 대해 대답을 못했다. 인사과가 산정한 점수를 사사오입했다고는 차마 말할 수 없었던 것이다.

돌아가면서 모든 사람들의 의견을 물었다는 사실은 민주적인 절차상 하등의 하자가 없어 보였다. 그러나 회의의 질은 형편없는 것이었다. 각자의 의견을 묻는다는 것은 각자의 '의사결정 결과'를 확인한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그 회의에서의 각자는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자료와 분석의 기회를 갖지 못했다.

어느 한 참석자가 이의를 제기했다. "회의의 형식적 절차는 나무랄 데 없는 민주주의 방식이지만 회의의 질은 영점입니다". 이에 따라 그때까지의 회의 결과는 무효로 하기로 했다. 우선은 새로 전입하는 학자를 부르기로 했다. 그를 불러 차를 마시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기로 했다. 낯선 학자에 대한 프로필을 실감 있게 확인됐다. 이는 가장 중요한 정보였다.

그 다음에는 이의를 제기한 사람이 칠판 앞에 섰다. 그는 참석자들에게 기존의 연구원들 중에서 심사대상자와 비슷한 사람들을 나열해 보라고 했다. 각자는 방금 만난 신인과 견줄 수 있는 기존의 연구자들을 하나씩 호명했다. 한 사람씩 한 사람씩 신인과 비교하기 시작했다.

여러 가지 의견들이 현장에서 창의적으로 나왔다. 누구보다는 낮아야 하고 누구보다는 높아야 한다는 결론이 자연스럽게 도출됐다. 이에 따라 그는 7호봉이 아니라 9호봉이 됐다. 2호봉차이는 3년간의 차이였다. 이처럼 회의를 주재하는 사람의 능력에 따라 회의의 결과는 천차만별이다.

이러한 회의는 한국의 어디서든지 구경할 수 있다. 짧은 시간에 회의를 생산성 있게 주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시스템적 사고에 훈련되지 않은 사람은 훌륭한 회의를 주재할 수 없다. 회의를 통해 아이디어를 생산할 줄 모르기 때문에 정부관리들은 과당경쟁과 같은 수많은 범정부적 문제들이 있을 때마다 회의를 열었지만 회의의 결과로 어떤 대책을 마련해본 적은 거의 없다.

2000. 7.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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