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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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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공해

공해는 건강을 해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환경공해를 걱정한다. 환경운동가들은 환경 오염과 파괴를 경고하는 데 많은 시간과 돈을 쓴다. 하지만 정작 사람에게 가장 치명적인 인간공해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쓰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공동으로 일을 하다보면 욕심, 가치관, 문화 그리고 감정들이 뒤얽혀 마음의 상처를 주고받는다. 심지어는 가족간에게도 마음의 상처를 주고받는다. 마음이 나빠서가 아니다. 다듬어지지 않은 서툰 매너, 다른 사람의 감정을 세심하게 배려할 줄 모르는 한국적 인습과 통념에서 기인한다. 무심코 던진 말이 상대방에게는 깊은 상처를 준다는 사실을 우리는 별로 생각하지 않는다.

유학까지 해서 공부를 많이 했던 젊은이가 전원생활을 해보겠다고 시골로 갔다. 부인은 상냥하고 피아노도 잘 치는 대학 졸업생이다. 슬하에 유치원생 남매를 두었다.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특수작물을 재배했다. 부인은 피아노 한번 칠 사이 없이 사시사철 노동일을 했다. 술을 좋아하는 남편은 서울에서 내려온 다른 젊은이들과 어울려 밤마다 술을 마셨고, 이런 생활이 고착되다 보니 옷 한번 버젓하게 입고 나가본 적이 없는 작업복 신세가 됐다.

이렇게 3년간을 참아온 부인은 차츰 남편과 대화마저 포기했다. 말해봐야 오히려 상처만 받기 때문이었다. 결국 입을 닫고 살던 어느 날 그 여인은 갑자기 정신질환을 일으켜 병원에 입원했다. 잽을 많이 허용한 권투선수가 조금씩 무너져 가듯이 남편이 날마다 한마디씩 던져준 말들에서 그 여인은 인생 한번 제대로 살아보지도 못한 채 중병에 걸린 것이다. 그 어느 환경적 공해가 사람을 이토록 무섭게 파괴할 수 있을까?

우리는 인생을 살아오면서 이렇듯 타인들로부터 많은 잽을 맞으며 살아온 것이다. 같은 잽을 맞고서도 사람마다 입는 상처가 다르다. 정신병을 얻는 사람, 암을 얻는 사람, 화병을 얻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대다수의 가슴들은 호연지기를 상실한 채 메마르고 옹졸하게 축소됐다.

내가 어렸을 때 당한 고통은 집 없고 돈 없는 설음 그리고 어린 나이에 보모와 떨어져 사는 데서 오는 보고픔의 설음들이었다. 그 때에는 내가 사회적으로 최하의 약자였기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동정과 사랑은 받았어도 마음의 상처를 입지는 않았다. 전방, 월남, 육군본부, 국방부 등에서 근무할 때에도 신나고 즐겁고 예쁨 받는 시간은 많았어도 심적으로 고통스러운 순간은 별로 없었다.

내가 속이 상한다고 처음으로 느껴본 시간은 나이 33세에 미국으로 첫 유학을 갔을 때였던 것 같다. 나는 1974년 6월에 생전 처음으로 유학 길에 올랐다. 방학 없이 1년 반만에 마치는 경영학 석사 과정에 입학한 것이다.

미군의 군사원조 중에서 가장 오래 지속됐던 것은 교육원조였다. 나는 한국정부의 배려에 의해 유학을 한 게 아니라 미국 정부의 배려에 의해 유학을 간 것이다. 미군 중에서 가장 많은 예산을 쓰는 군은 해군이다. 해군은 수상, 수중, 공중을 모두 과학적으로 정복해야 하는 과학군대요 시스템 군대다. 미국이 세계의 어느 곳으로나 군사력을 투입할 수 있는 힘(power projection forces)은 바로 해군의 힘 때문이다.

그래서 미 해군은 민간 분야에서는 대량으로 제공할 수 없는 각종 시스템 분야의 석사 및 박사를 길러내기 위해 대학원을 세웠다. 미 육해공군 장교를 위한 학교였지만 학교의 규모가 크기 때문에 연합군 육해공군 장교들도 일부 수용했다. 그 대신 교육비는 이웃 명문 대학에 비해 약 3배정도 비쌌다. 심지어는 교수와 1대1로 공부하는 제도도 있었다. 나도 그렇게 3 과목을 공부했다. 그야말로 귀족학교였다. 수학 정리와 공식을 내놓은 교수들이 수두룩했다.

내가 입학했을 때 한국군의 육해공군 장교 수는 11명이었고 그중 육군이 6명이었다. 높게는 8년 선배, 낮게는 2년 선배들 틈에 끼어 공부하기 시작했다. 비록 저마다 바쁘기는 해도 처음의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갈등의 조짐이 나타났다. 질투가 원인이었던 것 같다.

해군 장교 중에 나보다 1년 후배 되는 사람이 있었다. 키가 크고 꾸부정하며 구렛나루가 있는 수더분한 장교였다. 그는 자주 2 마일쯤 떨어진 동네의 카지노에 들렸다. 3-4년 선배들이 그 장교를 매우 못 마땅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그 장교 역시 선배들을 보아도 고개만 끄덕하고 말았다. 선배들은 이 장교를 더욱 더 미워했다. 하지만 그 장교는 나만큼은 좋아하고 따랐다. 나는 그의 비위를 맞추며 표나지 않게 그를 조금씩 선도하려 했다.

그 사이에 그가 귀국을 하게 됐다. 카지노 주인에게 1,000 달러의 빚을 진 채! 선배들이 한 방에 모여 그를 성토했다. 미움이 절정에 이르렀다. 나는 선배들에게 성토만 할 게 아니라 해결책을 찾아보자고 말했다. 해결책이 어디 있느냐며 선배들의 시선이 내게로 집중됐다. "야, 지 대위, 너 그 동안 CH 대위와 친하게 지내더니 둘 사이에 뭐 있는 게 아냐?"

기가 막혔다. 이 때까지 선배들은 후배를 따뜻하게 감싸는 존재로만 알고 있었던 내게는 엄청난 문화적 충격이었다. 나는 분노를 꾹 참고는 해결책이 있다고 말했다. 선배들도 기가 막힌지 말해보라고 했다.

"CH 대위는 이 학교에서 개인 자격이 아닙니다. 만일 빚을 갚지 않고 귀국하면 바로 그 다음날 카지노 주인이 학교로 찾아옵니다. 그러면 한국장교 모두가 얼굴을 들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니 우리가 선수를 쳐서 2달 이내에 그 돈을 갚아주겠다고 카지노 주인에게 약속을 하는 게 좋겠습니다. CH 대위는 비록 빚을 지고 가기는 하지만 그 돈을 갚지 않을 사람이 아닙니다. 만일 그가 갚지 않으면 우리가 해군참모총장에게 편지를 내면 됩니다. 편지를 받은 해군총장이 한국 해군의 명예가 달린 이 일에 아무려면 그냥 있겠습니까? 여기에서 CH 대위만 나무라면 문제가 해결되겠습니까?".

선배들은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 너 혹시 CH 대위하고 짜고 하는 거 아냐"는 식으로 나를 몰아쳤다. 나는 그들과는 상대하지 않을 것을 결심하고 문소리에 내 모든 감정을 표시하고 나와 버렸다. 훗날 이들 중에는 4성도 있었고 2성도 있었다.

공항에 CH 대위를 배웅 나온 장교는 단지 나 혼자 뿐이었다. 그는 내 손을 꼬옥 잡았다. "지 대위님 고맙습니다. 가자마자 돈을 만들어 송금하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무리 못났어도 돈 1,000달러에 인생을 팔겠습니까?"

아니나 다를까 바로 그 다음 날 카지노 주인이 학교를 찾아왔다. 4년 선배가 대표로 학교 당국에 불려가 톡톡히 망신을 당했고, 이 소문은 곧 28개국 장교들 사이에 모두 퍼졌다. 그리고 채 열흘이 안돼서 CH 대위가 내게 송금을 했다. 갚을 돈을 다 갚으면서도 한국군 장교들의 얼굴에 먹칠을 한 것이다.

그 후 선배들과 나는 거의 남남으로 지냈다. 그 덕에 나는 미국인들 틈에서 생활영어를 좀 더 익히게 되긴 했지만 선배들이 나를 바라보는 시각은 냉랭했다. 나는 마음에 상처를 입지 않으려고 그들과 더 멀리 했다.

4점 만점에 3.65 학점 이상을 받으면 명예롭게 학교 게시판에 부착되는 "Dean's List"에 올랐다. 내 이름도 거의 빠짐 없이 올랐다. 이에 대해 선배들은 한국장교단의 명예를 올려주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그런 내가 못 마땅했다. "경영학 과정은 쉬운 과정이야. 우리 시스템 공학과정에서 낙제된 장교들이 가는 데가 바로 경영학과야".

내가 다닌 학교에서는 컴퓨터과학과, 기계공학과, 전자공학과, 기상학, 원자물리학과, 수학과, 시스템공학과, 경영학과들이 있었다. 이들 과에 등록된 학생들은 다른 과에서 제공하는 과목들을 선택하여 학문의 인프라를 쌓았다. 나는 화가 나서 시스템공학과에서 제공하는 stochastic modeling이라는 확률수학 과목을 택하여 선배들과 경쟁했다. 선배들의 코를 납작하게 해줄 심산이었다.

그 결과 나는 "기업 감사"(audit)에 있어 공장 재고(WIP)에 대한 평가액을 확률적으로 예측해내는 수학모델을 개발해 교수들로부터 많은 가능성을 인정받게 되었고, 드디어는 학교 창설이래 처음으로 문과계통인 경영학과 석사가 이과계통인 시스템공학 박사과정에 입문할 수 있는 허가증(admission)까지 얻게 되었다.

교수가 국방장관에게 정중한 편지를 썼다. 한국군 장교에게 주어진 특수한 기회를 강조하면서 석사과정을 끝내고 바로 박사과정에 입학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요지의 편지였지만 우리 국방장관으로부터는 통 대답이 없었다.

당시 한국 국방부에는 맥나마라 선풍이 불었고, 육사 10년 선배가 국방부에서 체계분석실이라는 기구를 만들어 국내외에서 공부한 중령과 소령급 장교 20명 정도를 수용하고 있었다. 귀국하자마자 나도 이 부서에 배치됐다.

첫 출근을 하자 미국에서 같이 공부하던 선배들이 보였지만 어딘가 벌레 씹은 모습들이었다. 한동안 이유 없는 "왕따"가 시작됐다. 시간이 가면서 그 이유가 차츰 드러났다. 나보다 6년이나 선배인 해병대 중령이 박사과정을 가려고 모처럼 예산을 확보해 놓았는데 내가 그걸 중간에서 가로채려고 했다는 것이다.

차라리 내게 깨놓고 그런 섭섭함을 표현했다면 나는 충분히 해명을 했을 것이다. 미국에서 학교 다니기에만 바쁜 내가 본국에서 그런 예산이 확보돼 있는지, 본국에 그런 부서가 생겼는지 더구나 1인분의 박사 예산이 책정이 됐는지 어찌 안단 말인가?

하지만 내가 그들보다 한 수 위에 있다고 생각해온 그들은 내가 모든 걸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아무리 해명해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해명할수록 그들은 나를 점 점 더 나쁜 사람으로 치부할 것이었다.

1년 반의 왕따 생활은 참으로 고역이었다. 그 대신 나는 매일 미 국방성 회계제도와 감사제도에 대한 매뉴얼을 통달 할 수 있었다. 그때 나는 소령이었다. 예편을 하기로 작정하고 공인회계사 시험을 볼 준비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국방과학연구소에서 11년 선배 분이 나를 달라고 요청했다. 그 분의 노력으로 나는 홍릉에 있던 국방연구소로 출퇴근을 시작했다.

불과 1주일도 안 돼서 국방부의 그 10년 선배로부터 전화가 왔다. 미국으로 유학을 가라는 것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를 왕따 시킨 실장님이 나를 위하는 모습으로 바뀐 것이다. 어린아이 장난 같았다. 이유를 물어보니 그 해병대 중령이 미국 여러 대학에 백방으로 접촉했지만 입학허가서(admission)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확보해놓은 예산을 사용하지 않으면 행정적으로 입장이 곤란해진다는 것이었다.

나는 완강하게 거절했다. 박사를 따서 대통령이 된다 해도 나를 요청한 선배에 대한 도리가 아니었다. 그 10년 선배는 11년 선배에게 전화를 했다. 마지막 기회이니 설득해서 보내달라는 취지로. 11년 선배가 나를 불러 조용히 설득했다. 미국 교수에게 전화를 했다. 교수는 반가워하면서 내일 이 시간에 전화를 하라고 했다. 이튿날 전화를 하니 9월 학기에 입학하도록 허가되었다고 말했다.

나의 입학은 조건부였다. 1년 동안 시스템 공학에서 제공하는 과목들 중에서 핵심과목에 대해 공부하고 그 점수에 따라 박사과정이 허락된다는 것이었다. 최초 3개월간의 마음은 정말로 내 마음이 아니었다. 3개월 분기를 마감하는 시험이 끝난 후 나는 많은 술을 마시고 운전을 했다.

교통경찰이 뒤에서 따라 붙은 줄도 모르고 휘청거렸다. 경찰이 바씩 따라붙어 붉은 불을 비쳤다. 나는 차를 세우고 교통경찰의 요구에 응했다. 다리 하나를 교차로 들고 양손을 벌리고 손가락을 바로 세었다 거꾸로 세었다 했다. 분명히 술 냄새는 나는데 나의 행동은 조금도 비틀거리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진가민가 하는 사이에 교통경찰이 내게 물었다.

"술을 마셨습니까?". "그럼은요. 오늘 같은 날 어떻게 내가 술을 안 마실 수 있습니까?".의외의 대답이었는지 그는 나의 차 속을 들여다보았다. 시보레 8기통에 책이 잔뜩 쌓여 있는 걸 보더니 문을 잠그고 경찰 차에 타라고 했다. "아, 드디어 경찰서 맛까지 보겠구나" 하고 체념했다.

경찰은 내게 집이 어디냐고 물었다. "라메사" 해군관사 호수를 댔다. 그들은 차를 집 앞에 세우고 내리라 했다. 왜 경찰서로 안 가느냐고 했더니 그럴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럼 나더러 어떻게 하라는 거냐고 물었더니 집에서 편히 자라고 했다. 티켓이라도 주어야 할 것 아니냐고 했더니 그것도 필요 없다고 했다. 단지 다음부터는 술을 많이 마시지 말라고 했다. 정말로 의외의 대우였다. 나는 술김에 경찰관의 목을 안고 "I love you"를 외쳤다.

같은 학교에서 선배들은 석사과정을 공부하고 후배가 박사과정을 공부하는 데 대해 속상해 하는 2년 선배가 있었다. "지소령은 한국장교들은 안중에도 없고 교수들만 상대한다", "지가 잘나면 얼마나 잘났냐", "박사 시험에서 떨어질 거다" 등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말들이 들릴 때면 당장 만나자고 해서 따져주고 싶었다. 그 선배의 얼굴과 들리는 말이 포개지면 아무리 선배라도 턱에 주먹을 날리고 싶은 생각이 솟구쳤다.

그런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나는 뛰면서도 예수를 생각했다. 예수같이 훌륭한 성인도 남에게 조롱 받고 모함 받고 가시 면류관까지 썼는데 내가 얼마나 잘났다고 그런 비아냥거림에 속상해 하는가, 내가 저들과 일일이 대적하면 똑같은 사람이 된다, 너는 평생 그렇게 남의 속이나 긁으면서 살아라, 나는 너 같은 것들 무시하고 앞으로만 달린다, 그래, 잊자 잊어, 수학문제나 풀자. 뛰면서 수학문제를 풀다가도 접어둔 분노가 간간이 다시 타오르곤 했다.

아무런 이유 없이 단지 후배가 박사학위를 공부하고 있다는 그 자체로 그는 내게 1년 이상 엄청난 괴로움을 주었다. 견디다 못해 나는 밤 1시에 24시간 문을 여는 식당으로 그를 불렀다.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나는 그에게 최후 통첩을 했다. 그후부터 그는 말을 자제했지만 지금도 그 선배만큼은 만날까 무섭다. 아마도 그가 내게 준 인간공해는 내 몸 속 어디엔가 보이지 않는 질병으로 잠재해 있을지 모른다.

나는 40대의 대부분을 국책 연구소에서 보냈다. 1980년 대 초에 내가 처음으로 연구소에 보직돼 갔을 때 그 연구소는 육사를 나온 3인의 호남인들이 휘어잡고 있었다. 이들은 각기 경제학, 경영학, 정치학 박사들이었지만 모두가 육사 출신 현역 장교들이었다. 대령, 중령, 소령.

그 연구소에는 많은 육사 출신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 3인에게 육사 선후배는 그리 중요한 고려 요소가 아니었다. 이들은 선배들을 그들 방으로 불러 따지고 지시하는 일도 서슴치 않았다.

그들의 텃세는 정도를 지나쳤다. 연구소에 먼저 들어와 높은 호봉을 향유하고 있다는 이유 하나로, 중령 박사가 대령 박사보다 높은 보직을 차지했고, 대령 박사를 중령 박사 사무실로 오라 가라 불러대는 가 하면 심지어는 브리핑까지 하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그야말로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이들이었다. 그들의 말에 복종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들로부터 은근한 압력, 협박, 모략 그리고 불이익에 시달려야 했었다.

그 세 사람은 연구소에 있던 수많은 비호남인들에게 호남인들에 대한 반감과 염증을 고조시켰다. 몇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 전 호남인들에 대한 이미지를 실추시켰고, 호남인 공동의 집을 허물어 버렸다.

비호남인들은 술자리에서도 그 3인의 호남인들을 욕하고 비난하고 비웃는 것으로 안주를 삼았고, 그들이 접촉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호남 삼총사들의 야비함을 악선전했다. 바로 이 조그만 직장에서 나타났던 이 하나의 극적인 사례, 이것을 그대로 확대 복사하면 지금의 호남인 대 비호남인들간의 문제를 극명하게 설명해주지 않을까?

기왕 호남 이야기가 나왔으니 조금만 더 이야기 해보자. 강원도, 경기도, 서울, 미국, 월남 등 수많은 곳들을 돌아다니면서 많은 사람들을 접하면서 발견한 것은, 내가 만난 대부분의 비호남인들이 나와 유사한 경로를 통해 호남인들에 대한 나쁜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서울에서도, 경기도에서도, 강원도에서도 은근한 눈길을 느끼며 살아간다면 그들은 얼마나 고통스럽겠는가? 한국인들은 대체적으로 한이 많은 민족이라 한다. 좁은 땅에서도 어디를 가나 은근한 시선을 느껴야 하는 호남인들의 한은 아마도 더욱 더 두드러질 것 같다. 그래서 어디를 가나 똘똘 뭉치는 것이 아닐까싶다.

똘똘 뭉치는 모습을 보여주면, 그들은 비호남인들로부터 더욱 더 감정적인 보복을 받게 될 것이고, 감정적인 보복을 받으면 받을 수록 그들은 더욱 더 똘똘 뭉치는 악순환이 계속될 것이다.

7년 전. 한 호남 출신 소령이 육두품 장교라는 책을 써서 호남인들에 대한 차별대우를 호소한 적이 있었다. 그를 만나보니, 참으로 진솔한 장교였다. 그는 호남인들에 대한 차별대우를 이렇게 표현했다. "할 수만 있다면 호남이 따로 독립해서 별도의 국가를 세워 차별대우를 받지 않고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아, 그렇겠구나". 그의 이 엉뚱한 말은 내게 조금도 충격이 아니었다. 나는 아주 어려서부터 호남인들에 대한 좋지 못한 이야기들을 들어왔다. 그것도 하늘이 돈 쪽만 한, 첩첩 산중의 산간 마을에서, 그 마을을 세상의 전부로 알고 살아가는 촌 어른들로부터 들었다.

3총사는 내가 부임하자 나를 자기들의 영향력 하에 두려 했다. 자기 말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선배가 내게 욕을 하고 멱살을 잡아 몸싸움까지 벌린 적이 있었다. 싸웠다는 이유로 예비역 2성 장군인 연구소장이 나를 불러 국방대학원으로 보내 줄 터이니 연구소를 나가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저는 양손에 해야 할 일을 가지고 연구소에 왔습니다. 소장님은 이 연구소에 무엇을 하러 오셨습니까? 양손에 쥐어진 것이 있으면 내놔 보십시오. 저는 연구소에 할 일이 있어서 왔고, 연구소장님은 그게 없습니다. 누가 연구소를 나가야 합니까? 나이 어린 학자들이 싸울 수도 있습니다. 싸웠으면 자초지종을 따져 주시든지 화해를 시키셔야지 어째서 소장님은 3총사 세력을 감싸십니까? 저는 그렇게 호락호락 나갈 사람이 아닙니다. 지금 소장님께서는 3총사를 싸고 도시기 때문에 연구소 모든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고 계십니다. 제가 나가면 소장님도 나가십니다. 같이 나가시지요".

"언제 내게 이렇듯 대담한 기운이 담겨져 있었을까!". 만만히 보였던 나로부터 엄청난 충격을 받았는지 그의 얼굴은 일거에 백지장이 됐고, 손과 얼굴에 심한 경련이 일었다. 연구소장 실에서 고성이 오갔다. 소문이 일시에 퍼졌다. "지박사가 아무개 박사와 붙었대, 소장하고도 붙었대". 소문이 퍼진 것만큼 그들의 체신도 떨어졌다. 그후부터 연구소장과 3총사가 한편이 되어 나를 틈만 있으면 왕따를 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대다수의 연구소 사람들은 심정적으로 나를 응원했다. 대리만족인 것이다.

남들은 편하게 사는 데 어째서 나만 괴롭게 세상을 사는가! 혹시 내 운명에 내가 모르는 그 어떤 것이 존재하는 게 아닐까! 어느 날 새벽, 나는 평창동에 계시는 용하다는 할머니를 찾아갔다. "실타래처럼 얽힌 일을 풀 사람은 임자 뿐이야. 누구도 이 문제를 풀어줄 수가 없어. 다행이 임자에게는 총명함이 있으니 내려가서 풀어봐요. 수학문제처럼 말이야". "아! 저렇게 연로하신 할머니가 어떻게 이렇듯 과학적일 수 있을까!"

"역시 모든 운명은 내가 헤쳐나가야 한다". 그 할머니는 내게 이 엄청난 진리를 확인시켜 주었다. 할머니가 참으로 고마웠다. 이판사판이라고 생각한 나는 호남 출신 국방장관에게 달려가 그들의 파행을 호소했다.

"장관님, 저들이 장관님과 동향임을 내세워 힘 자랑을 하고 있습니다. 연구소장도 저들의 손에 놀아나고 있습니다. 저는 대령입니다. 아무개는 중령입니다. 연구소이기 때문에 대령도 장군도 중령 밑에 있어야 한다면 군 인사규정에 그런 예외 조항을 넣어 주십시요. 그러면 저는 그 인사규정을 복사해 가지고 가족과 친구들에게 떳떳하게 보여주면서 대령이 중령 밑에서 일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말하겠습니다. 그렇지 않는 한, 제게 달아주신 이 대령 계급장은 명예스러운 게 아니라 치욕스러운 것입니다. 장관님, 제게 대령을 달아 주셨으니, 이제 대령을 떼어가 주십시요"

이 말을 들은 장관은 노발대발했다.

"이런지 얼마나 됐니?", "1년쯤 됐습니다", "왜 진작 내게 말하지 그랬니, 그동안 얼마나 마음의 고생이 컸겠니". 그래, 알았다, 이후부터는 내가 나서마".

당시 윤성민 국방장관은 나의 연구결과를 가지고 전군에 예산개혁을 주도하고 있어서 나를 보배라고 공언하며 총애했다. 그는 공식성상에서 "앞으로 비서실은 지박사가 장관을 만나려고 하면 2일 이내에 계획하라. 하루에 8시간도 좋다"라고 할 정도로 그는 나를 아꼈다. 내가 1년간의 고통을 참아 온 것은 그런 관계를 허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일단 장관을 그런 일로 써먹으면 아무래도 장관과 나 사이가 이전 처럼 부드러울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국방장관은 3총사를 모두 해산시킬 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그들은 교묘하게 비호세력을 이용해 미국의 연구소 등으로 피신을 했다. 연구소장은 1주일간 겨울 새벽 7시에 국방장관실에 나가 장관이 출근할 때까지 무릎을 꿇고 장관에게 용서를 빌었다.

3총사가 해체되고 난 후부터 연구소장은 연구소 일을 나에게 의논했다. 시간이 갈수록 그는 나를 신임했고 좋아했다. 그후 육사 10년 선배가 국방부에서 요직을 차지
하고 있으면서 나를 골치 아픈 트러불메이커라며 국방대학원으로 내보라고 할 때에도 연구소장은 나를 비호했다.

나는 당시 전두환 대통령의 명에 의해 율곡 10년 평가를 했으며 그 결과는 일종의 핵폭탄 뭉치였다. 그 핵폭탄 중의 하나가 222사업이라고 명명된 공군방공자동화사업이었다. 당시 2억5천만 달러에 구입한 공군방공자동화사업을 단 돈 25달러 가치도 없는 폐품이라고 발표하자 군 전체가 뒤집히는 듯 요란했다.

이기백 당시 국방장관과 김인기 공군총장이 전두환 대통령으로부터 엄청난 질책을 받았다. 이에 앙심을 먹고 이기백 국방장관, 황인수 국방차관, 황관영 기획실장 등이 주축이 되어 나를 연구소에서 내보내려 했다.

불과 3개월 후 그 10년 선배가 연구소장으로 부임하자마자 그는 나를 무조건 나가라고 했다. 내가 대통령에게 진정서를 낸다 해도 중간에 비서관들이 장난질을 칠 가능성이 많을 것으로 여겨지는 순간 나는 내 발로 연구소를 나갔다.

"선배님, 오래 사십시오", 배참으로 던진 이 한 마디가 저주가 될 줄은 정말 몰랐다. 미국으로 떠난 후 불과 2년이 자나 누가 봐도 건장했던 연구소장은 유명을 달리 했다.

사람들은 대개 마음의 상처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인생이 얼마나 행복한가, 얼마나 건강하게 사는가는 아마도 "마음의 상처"를 어떻게 경영할 것인가에 달려 있는 게 아닐까? 우선 식구들에 대한 "상처관리"로부터 시작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마음의 상처는 서로 주고 받는 과정에서 증폭된다. 상처받기 싫으면 상처를 주지 말아야 한다.

미국에 살면 하루에도 수십 번씩 듣는 말이 있다. "Be careful". 하지만 "조심해야지"라는 말. 한국사회에서는 참으로 듣기 어려운 말이다. 조심성이 부족해서 남의 감정을 예사로 건드리고, 귀중한 물건을 함부로 다루며, 상품의 마무리가 신통치 못한 것이다. 남의 상처를 배려한다는 것은 상품의 품질을 만들어 내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다. "Be careful" 마인드 없이는 절대로 남의 상처를 효과적으로 배려할 수 없다.

상처를 줄이면서 원하는 효과를 내려면 어떤 원칙을 지켜야 할 것인가? 매일매일 새로운 방법을 찾아내고 그 방법이 실현될 수밖에 없는 원칙을 뽑아내 행동 표준(Home Standards)으로 정착시켜야 한다. 이런 노력이 없다면 가정의 행복도 가족의 건강도 지켜질 수 없을 것이다. 이 세상에 거저 주어지는 선물은 단 한 개도 없다.

2001. 1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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