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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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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환상의 마우이)

하와이주는 여섯 개의 큰 섬으로 구성됐다. 호놀룰루에서 마우이섬을 가는 데에는 20분이 걸렸다. 섬과 섬 사이를 왕래하는 여객기의 분위기는 완전 하와이 분위기였다. 공항 벽에 그려진 그림, 기체에 그려진 그림, 알로에 꽃향기, 노출된 그림 옷들, 모두가 기분을 들뜨게 하는 것들이었다.

낮게 떠가는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는 남태평양 바다는 성난 파도가 출렁이는 태평양 바다에 비하면 온순하고 만만해 보였다.

꼭 오뚜기를 동서로 뉘어놓은 것 같은 마우이 섬엔 사람도 뜸하고 차량도 뜸한 그야말로 원시의 처녀성을 그대로 간직한 조용한 섬으로 보였다. 서쪽에는 머리 부분이, 그리고 동쪽에는 몸통 부분이 있고, 오뚜기 허리선에는 남북으로 달리는 311번 도로가 나 있다. 카훌루이 공항은 남북 도로의 북단에 있다.

호놀룰루가 있는 오아후 섬은 작지만 구섞 구섞이 개발돼 있지만 마우이 섬은 아직도 개발되지 않은 곳이 개발된 곳보다 훨씬 더 많다. 서쪽에 있는 오뚜기 머리부분만 개발돼 있고 동쪽에 있는 큰 부분에는 도로 조차 없다.

도로의 양쪽에 광활한 사탕수수밭이 펼쳐졌다. 사탕수수 줄기들이 세찬 바람에 휘청거렸다. 멀리 갈대밭 위에도 세찬 바람이 흘러 다녔다. 차창을 열었다. 들여 치는 훈훈한 바람이 에어컨 바람과 섞여 상쾌하게 뺨을 때렸다.

키하이라는 마을 표말이 보였다. 속이 들여다보일 것 같이 투명한 바다가 시원하게 들어왔다. 아름다운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는데도 사람이 별로 없었다.

차를 서서히 몰았다. 다른 차들이 뒤에 와 붙으면 깜박이 신호를 켜주며 길을 양보해 주었다. 노변의 작은 공터에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과일들을 내다 파는 원주민들의 시골 장터였다. 과일의 여왕이라는 망고스텐, 파파야, 망고, 파인애플, 청포도, 말린 자두와 살구도 있었다.

2차선 도로였다. 손만 내밀면 흰모래가 잡힐 만큼 물가에 바짝 붙어 달렸다. 거의 모든 차들이 느린 속도를 유지하며 아름다운 경관에 눈을 팔고 있었다. 대형 세이프웨이(SAFEWAY)가 나타났다. 음료수 코너에 들려 갖가지 과일 쥬스를 하나씩 골랐다.

벽 밑에서 바닷물이 출렁이는 로얄마우이 호텔에 주차를 했다. 호텔과 모래 사이에 푸른 잔디가 가꿔져 있고, 그 잔디밭에는 야자수들이, 마치 사열을 받는 병사들처럼 가지런히 배열돼 있었다.

멀리는 검푸른 바닷물이 넘실거렸고 바로 야자수 밑에서는 감미로운 실파도가 끝없이 밀려왔다가 부서지고 있었다. 바다 바람이 가슴 속 깊이까지 불어들어 왔다. 실눈 속에 감춰진 행복이 숲 속의 호수처럼 고요하고 신비로워 보였을 것이다.

해변을 따라 호텔이 늘어서 있었다. 호텔마다 독특하게 가꾼 정취들이 하나같이 아름다워 보였다. 잔디밭 속에 묻어둔 조명이 까마득하게 올려다 보이는 야자수 잎을 향해 불빛을 쏘아 올리고 있었다. 강한 조명 속에 드러난 야자수 잎들이 투명한 초록빛을 내뿜는 발광체처럼 바닷바람에 나부꼈다. 야자수 위에는 남국의 하늘이 낮게 드리워 져 있었고, 수 없이 떠 있는 별들이 초롱초롱 빛을 발하고 있었다.

주먹만한 별들이 귀엽게 조잘대는 입들로 보였다. 모든 입들이 종알거리고 있었다. 할 말이 많은가보다. 마치 그 동안 아무도 그들의 말을 들어주지 않다가 내가 오자 임자라도 만났다는 듯이 밀렸던 말들을 숨차게 털어놓는 것 같다.

수많은 사람들이 다녀갔지만 낭만도 없고 가슴도 옹졸하고, 한마디로 메말라 버린 그런 사람들뿐이었다고 말하는 것 같다. 여기에까지 와서도 다투고, 질투하고, 집안 일을 걱정하고, 목에 힘을 주는 사람도 있었고, 돈 버는 일 생각하는 그런 사람들만 보았는데 당신은 어떤 사람이냐고 묻는 것 같다.

야자수 위에 매달린 조명이 바닷가를 내리 비추고 있었다. 눈부시게 흰 은구술 무더기가 쉴새 없이 부서졌다. 모래밭이 백설같이 부각됐다. 여기 저기놓여진 비치 의자 위에는 밤바다를 즐기려는 사람들이 바다를 향해 누워 있고, 풀장에는 칵테일을 즐기는 사람들이 마냥 즐거운 양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마우이 둘째 날이었다. 언제나 처럼 바닷가의 아침이 화려하게 밝아왔다. 바다 위에서 해가 뜨고 바다위로 해가 지는 이국의 경이로운 자연 속에 한동안 시간을 묻기로 했다. 정해진 여정도 없었다.

먼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피부를 두껍게 밀었다. 멀리서부터 일기 시작한 파도가 고래수염을 성클게 뒤로 날리면서 기세 좋게 달려왔다. 그리고는 심술궂게 모래 바닥을 헤집어 놓았다. 파편처럼 부서진 파도 조각들이 하늘 높히 치솟아 올랐다. 바닷가 전체가 온통 뽀얀 물보라로 뒤덮였다.

모래 위에는 다른 세계가 펼쳐졌다. 띄엄띄엄 쌍쌍의 연인들이 아침 산책을 즐기고 있었다. 태양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선그라스를 썼는데도 눈이 부셨다. 습기가 끈끈하게 옷 속을 파고들었다. 샌달을 벗어들고 찰랑이는 물가를 걸었다. 들락이는 바닷물에 발목을 적셨다. 파도가 밀려올 때마다 입을 크게 벌리고 소리를 쳤다.

모래밭이 끝나고 검은 바위가 이어졌다. 바위틈 사이로 오밀조밀 웅덩이들이 구성됐다. 웅덩이의 크기에 따라 바닷물의 색깔이 달랐다. 수많은 사람들이 다녀갔지만 패여진 웅덩이에는 병두껑 하나 가라앉지 않았다. 원시 그대로의 자연이었다. 물 색깔이 너무나 고와 탄성이 절로 났다.
"내일도 모래도 여기 와서 놀아야지"

깨끗하게 가꿔진 상가들을 기웃거리다가 24시간 문을 여는 데니스에 들어갔다. 커피를 마시는 시간이 식사하는 시간보다 더 즐거웠다.

객실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고 커다란 타올을 챙겼다. 스트로폴로 만들어진 아이스박스도 꺼내고 챙이 넓은 모자도 챙겼다. 수영복과 비치 가운도 챙겼다. 반바지에 느슨한 티를 입었다.

차에 시동을 걸었다. 지도를 펴놓고 오뚜기 섬의 머리 부분을 돌아보기로 했다. 꼬불꼬불한 해안 도로를 달렸다. 태양의 위치에 따라 바다의 색깔이 달랐다. 달리는 곳마다 경치가 바뀌고 정서가 새로웠다. 감탄사가 연발됐다.

라하이나 항구에 대단위 쇼핑가가 형성돼 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한 그루의 나무가 형성한 방대한 숲이었다. 수백년 전 한 그루의 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그 나무에서 뻗어나간 가지가 수염 같은 뿌리를 밑으로 드리웠다. 그 뿌리가 땅에 박혀 다시 나무 기둥이 됐다. 이렇게 해서 형성된 나무 기둥이 수십 개나 됐다. 어느 것이 원래의 줄기이고 어느 것이 나중에 생긴 줄기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상가가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어느 한집에 화재가 발생하면 모든 상가가 타버리도록 연결돼 있었다. 그러나 집집마다 특색이 있고 고급스러워 보였다. 상가 자체가 예술이었다. 관광상품의 아이디어들이 다양하고 기상천외했다. 모두를 갖고 싶었다. 아이 쇼핑 자체도 커다란 관광이었다.

어느 한 상점 앞에 발발이 강아지만 한 크기의 하얀 색 돼지가 매어져 있었다. 머리엔 화려한 리본을 달고 목에는 빨간 색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그 돼지는 말을 꽤 알아듣는 듯 주인과 놀이를 하고 있었다.

점심을 먹으려고 중국 음식점을 찾았다. 값싼 점심 메뉴들이 나열돼 있었다. 10불 짜리 한 접시면 꽤 잘먹는 점심이었다. 맛도 기가 막히고 양도 너무 많았다.

대형 마트에 들려 얼음과 과일 쥬스들을 사서 아이스박스에 넣었다. 사과와 오렌지, 살구, 자두도 사 넣었다. 아슬아슬하고 험한 장정의 드라이브 길에 나선 것이다. 해변가에 간간이 늘어선 마을들이 그림같이 아름다웠다. 검푸른 숲이 우거지고 새빨간 열대성 꽃들이 후드러지게 피어있었다. 호텔 건물들이 제각기 독특한 멋을 간직한 채 예술품처럼 늘어서 있었다. 도로의 우측으로 줄지어 늘어선 그림 같은 골프장들이 휴양지의 멋과 분위기를 한층 평화롭게 가꿨다.

때로는 길가에, 때로는 마을 어귀에 차를 세워가면서 그 아름다움들에 한껏 도취했다. 마을 속으로 들어가 보면 또 다른 아름다움들이 어우러져 있었다. 어느 것이 자연이고 어느 것이 인조인지 구별이 안갈 만큼 모든 창조품들은 자연을 모방하고 있었다.

한참을 달리자 평화롭던 마을이 모두 사라지고 천야만야 낭떠러지가 나타났다. 도로 가의 넓은 공터에 차를 세웠다. 미국말로 비스타포인트라고 하는 관망대였다. 현기증이 날만큼 까마득한 벼랑 아래 검푸른 물이 무엇이든 금방 집어삼킬 듯이 넘실거렸다. 그 사나운 물결에서 눈을 떼려는 순간, 누군가가 "야! 저 거북이 좀 봐"(look at the turtles) 하고 소리쳤다.

두 마리의 거북이가 물표면 가까이 올라와 유유히 수영을 하고 있었다. 박제된 거북이는 보았지만 살아 움직이는 커다란 거북이를 보는 것은 난생 처음이었다.

아슬아슬한 벼랑길이 산허리를 타고 돌았다. 차 한 대가 겨우 다닐 수 있는 좁은 길이었다. 핸들을 조금만 잘못 틀어도 낭떠러지로 구를 수밖에 없는 위험한 길이었다. 꼬불꼬불한 벼랑길이라 마주 오는 차가 멀리서부터 보였다. 반대편에서 차가 오면 약간이라도 옴폭하게 패인 도로변에 차를 세우고 상대방 차가 오기를 기다려 줘야 했다. 차를 후진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뒤에는 미국인 관광객들이 늘어서 있었다. 도로변에 차를 세우고 뒤따라오는 미국인에게 앞장서라며 차례를 양보했다. 그러나 그 미국인 부부는 웃으면서 사양했다. 내가 안전한 조치를 잘 취하면서 앞장서있기 때문에 자기들은 참 편하다고 했다. 네 시간 동안의 드라이브 끝에 차는 안전한 육로로 나왔다. "후!" 이제는 살았다 싶어 한동안 가슴을 쓸어 내렸다.

2001. 11.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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