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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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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으면 썩을 살, 아끼면 무얼 해

월남에서 돌아온 이후 나는 양구 21사단에 일시 배치됐다가 곧바로 광주로 내려가 4개월간의 고등군사반 과정을 마친 후 화천의 855군단포병 대대로 갔다. 겨울의 화천은 그야말로 시베리아였고 을씨년스러웠다. 민가 하숙집들은 대개 얇은 흙벽 건물이었다. 겨울에는 벽의 안쪽에도 두꺼운 성애가 쌓여 한데나 다름없었다. 이불을 돌돌 말고 면장갑을 낀 채 쪼그려 앉아 덜덜 떨면서 신문을 읽어야 했다. 나는 한글신문 대신 영자신문을 구독했다. 월남에서 꾸준히 영문 단편소설들을 읽긴 했지만 신문을 읽으니 용어들부터 낯설었다. 첫 페이지를 읽는데도 한 시간이 걸렸다. 한 줄을 읽는 데에도 사전을 뒤져야 했다. 그렇게 하기를 6개월이 지나자 그 때부터는 영자신문을 읽는 편이 훨씬 편해졌다.

화천에서 6개월을 지내는 동안 나는 매 주말마다 서울로 외박을 나갔다. 당시 대대장님은 주말 외출을 통제해왔지만 내가 대대장의 비위를 잘 맞추면서 외박을 나가는 바람에 다른 장교들의 외출에 대해서도 관대해졌다. “대대장님, 월남에서 지겹게 떨어져 살았는데 1주일 에 하루는 가족과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저 이혼 당합니다”. 이렇게 호소하는 데에야 대대장님도 어찌 할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렇다 해도 화천에 오래 있는다는 것은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탈출한 곳이 바로 전략정보과정이었다.

  10개월 간의 전략정보 과정에 입교하여 전략정보 교육과 집중적인 영어 훈련에 몰입했다. 출퇴근 버스에서는 물론 휴일에도 꼬박 책상에 앉아 공부를 했다. 공부하는 정신이 가상하다며 이웃집 선배 부인들이 마실 것과 반찬과 간식 거리를 줄을 이어 보급해주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영어부에서 1등으로 졸업하여 대위로서는 유일하게 합참 정보국에 근무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국방부와 합참 전체를 통 털어 대위는 오직 나 혼자 뿐이었다. 나는 해외에 공관에 파견된 30여 무관부와 파우치(외교행낭)를 주고받는 파우치 장교로 발령 받았으며 부탁은 받아도 아쉬운 말을 하지 않는 소위 끗발 있는 직책을 담당하게 됐다. 이 직책에 있으면서 나는 많은 비밀문서를 읽을 수 있었고, 이는 상당한 공부가 됐다.

이 직책을 인계해준 전임자도 나보다 한참 선배였고, 2년 반 후에 내가 이 직책을 다시 인계해준 후임자 역시 내가 사관학교 4학년 때 중위였던 대 선배였다. 전임자는 늘 전화를 붙들고 여러 부서 행정장교들과 감정을 주고받으며 짜증을 냈다. 해외 무관들로부터 보내오는 비밀문서들은 합참 정보국 여러 부서들에 배부돼야 했다. 선배는 사무실의 한 쪽에 기다란 테이블을 설치해놓고 그 비밀서류들을 각 과별로 쌓아놓은 후, 10여 개 부서에 일일이 전화를 걸어 비밀문서가 있으니 빨리 와서 가져가라고 했다. 하지만 선배의 마음처럼 빨리빨리 움직여주는 부서는 별로 없었다. 비밀문서를 행여 분실할까 염려하여 점심식사도 제 시간에 하러 나가지를 못했다. 배가 고픈 선배는 미처 문서들을 찾아가지 않은 부서에 전화를 걸어 신경질을 냈고 이로 인해 때로는 말싸움도 있었다. 이러한 식으로 선배와 다른 부서 행정장교들 사이에는 감정이 악화돼 있었다.

선배가 사무실을 떠나자마자 나는 마치 신문 배달소년처럼 비밀문서들을 옆구리에 끼고 각 층을 돌면서 배달해주었다. 문서들을 앉아서 받는 행정장교들은 출신은 달라도 모두 다 선배들이었다. 내가 그들의 사무실에 나타나면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지으면서 강제로 붙들어 앉히며 이야기도 해주고 차도 대접했다. 나보다 나이 먹은 선배들로부터 유익한 정보도 듣고 인심도 얻게 된 것이다.

나는 어렸을 때, 초등학교 선생님으로부터 “죽으면 썩을 살, 아끼면 무엇 해”라는 말을 깊이 삭여 들은 일이 있다. 내가 조금만 더 고생하면 수많은 사람들과 사이좋게 지낼 수 있는데 구태여 내 일, 네 일 따지며 싸워서 얻을 게 없다는 일종의 처세술을 터득하고 있었다. 언제나 내가 손해본다는 기분으로 세상을 살면 마음이 그만큼 편해진다는 진리도 터득했다. 조금을 얻기 위해 마음을 상하게 하고 이미지를 상하게 할 필요는 없다는 진리도 터득했다. 이 간단한 문서배달이 내게 주는 이익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국방부-합참에서 나는 인기 좋은 대위가 됐고 지 대위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확산됐다.

급한 공문을 만들어야 할 경우 다른 부서 아가씨들에게 달려가면 언제나 서비스를 받을 수 있었다. 그녀들은 다른 타자를 치다가도 내 일부터 해주곤 했다. 타자에 관한 한, 내 사무실, 다른 사무실이 따로 없었다. 이렇게 공을 쌓은 결과는 6년 후에 나타났다. 당시는 대위였지만 6년 후인 1977년 내가 소령을 달고 다시 미국에 박사과정으로 공부하러 갔을 때, 마침 당시 무관으로 근무하시던 분들이 중령 진급심사위원들로 차출되어 나를 강력하게 밀어 특진을 시켜 주었다한다. 공부하러 나간 장교를 특진시키는 예는 없었기 때문에 나는 의외의 특진을 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중령까지는 동기생 진급에 선두 그룹에 끼어 있었다.

  매주 2회씩 30여 개의 외교행낭(Diplomatic Pouch)을 꾸려야 했다. 밤늦도록 각 행낭에 서류를 집어넣고 문서 목록을 작성하고 납으로 봉인하고 나면 손바닥에 허물이 벗겨지곤 했다. 그런데 해군의 아주 어린 하사가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 도와주러 오겠다고 했다. 그는 해군출신 무관에게 부탁할 일이 더러 있었다. 물론 해군본부 장성들의 부탁을 대행하는 것이었다. 그 작은 부탁을 하기 위해 그는 미리 와서 나를 도와주었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그의 모든 부탁은 별것 아니긴 해도 무조건 수용되었다. 내게 그 하사는 계급으로 하사가 아니라 서로 의지하는 친구가 됐다.

반면 정작 부탁이 많은 육군 소령은 모든 부탁을 기분상하는 식으로 해왔다. “이건 어느 장군의 지시사항인데요. . .”. 내가 그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면 장군으로부터 혼날 것이라는 암시였다. 진급이 걸려있는 영관급 장교들은 장군들 세계에서 좋은 평판을 얻어야 하기 때문에 이런 어조의 부탁(?)이 잘 통하지만 내게는 이러한 언어가 반발심을 유발했다. 그런 식의 부탁이면 무조건 거절해 버렸다. 나의 직속상관인 대령에게 압력을 넣으려면 그 소령은 장군에게 “지 대위가 말을 잘 안 듣는다”고 고자질을 해야 한다. 그러면 장군은 아마도 “야, 이 바보 같은 놈아, 소령이 대위 하나 구슬리지 못하느냐”라고 야단을 칠 것이다. 전속부관을 하면서 장군 세계를 너무나 빤히 알고 있는 나는 장군을 파는 이런 부탁을 모두 거절해 버렸다. 한번은 이웃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육사 10년 선배와 말다툼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선배는 통이 커서인지 그 후부터 나를 친동생처럼 귀여워 해 주었다. 그 다음부터는 육군소령도 장군도 육군대위에게 계급이 아니라 인간적으로 예의를 갖춰서 부탁을 해 왔다.

나는 전속부관을 하면서 대위가 장군 한 사람 정도를 왜곡된 길로 유도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다. 합참에서 근무를 하면서 나는 계급을 앞세워 의사를 관철하려는 장군을 얼마든지 따돌림 시킬 수 있다는 생각도 했다. 누구든 겉으로 잘 보인다 해서 심복으로 믿었다가는 낭패를 당할 수 있는 것이다. 한 사람에게 배반당하지 않으려면 비밀이 없어야 하고, 비밀이 없으면 심복도 있을 필요가 없다. 차라리 모든 것을 공개적으로 깨놓을 때에 나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날 수 있다.

계급으로 누르려 하면 반드시 저항세력이 나타나게 마련이다. 한번은 육군 대위에 불과했던 내가 잘 나가는 육군 소장을 매장시키려 한 적도 있었다. 그 육군 소장은 당시 육군에서 아주 중요한 직책에 있었고, 훗날 참모총장은 물론 장관보다 더 높은 직책을 수행했던 분이다. 그 장군 앞으로 외국에 나가있는 모 무관이 금괴 사이즈의 아주 무거운 박스들을 여러 개 보내왔다. 박스들은 아주 단단하게 포장돼 있었다.

나는 친하게 지내던 사관학교 5년 선배인 모 중령을 찾아갔다. 그는 특수 직책상 상당한 수준의 사진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내가 가져간 포장물들을 기술적으로 뜯었다. 그런데 그 포장 속에는 순금으로 만든 독일 금화가 들어 있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금값도 상당하지만 기념품으로서의 가치도 들어 있는 그야말로 뇌물용이었다. 그는 이 모두를 사진에 담았다. 그리고 시치미를 떼고 그 물건을 나의 직속상관인 대령에게 내주었다. 대령은 그 물건들을 소중히 다루면서 누런 서류봉투들 속에 넣어 테이프를 발라 가지고 육군본부로 들어갔다. 대령은 이미 그 장군으로부터 중요한 물건이니 잘 챙겨달라는 부탁을 받은 모양이었다. 그 장군은 언제나 스스로 청렴결백함을 선전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를 청렴결백하다고 선전하는 사람을 믿지 않는다. 그 후 선배와 나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저 사람들은 이제 황혼기에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아직도 갈 길이 있다. 우리가 저 사람들에게 도전한다 해도 우리만 망가질 것이다. 더러워도 참자. 없었던 일로 하자. 우리가 나서서 고쳐질 일도 아니지만 그거 하나 고친다고 해서 세상 달라질 게 뭐 있겠나”.

파우치를 외국으로 내보내려면 항공수송업자와 거래를 해야 한다. 모 항공수송업체에는 미스 홍이라는 아가씨가 있었다. 나는 과에서 가장 졸병인지라 할 일이 너무 많아 파우치 일을 잊고 있을 때가 많았다. 하지만 미스 홍은 시간만 되면 정확하게 전화를 해주었다. 목소리가 그야말로 꾀꼬리 소리처럼 아름다웠고 윤기가 철철 넘쳤다. ‘아나운서는 저리 가라’ 였다. 각 파우치가 어디에서 어느 항공기에 실려 무슨 항공편으로 어디 어디를 경과하여 어느 날 몇 시에 어느 항공기 편으로 목적지에 도달할 것이라는 것을 불러주려면 한 시간 정도를 통화해야 했다. 그녀의 외국어 발음은 그야말로 훌륭했다. 지금이라면 팩스나 전자 매일로 할 수 있는 일을 그렇게 목소리로 한 것이다. 통화내용은 삭막하기 이를 데 없지만 통화를 시작할 때와 끝맺음할 때 주고받는 상냥한 인사가 너무 좋았고, 사무적인 목소리를 낼 때에도 그녀의 음성이 너무 듣기 좋아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같은 사무실 선배들과 아가씨는 내게 전화를 건네주면서 애인한테서 전화 왔다며 놀려주기도 했다. 하지만 2년 반을 그렇게 했으면서도 나는 한번도 미스 홍을 만나보지 못한 채 유학 길에 올랐다.

삼각지에서의 2년반 정도의 생활은 선배들과 어울리는 시간들이었다. 선배들로부터 성숙된 시각을 접할 수 있었고, 이는 전투에만 몰입해 있던 나의 좁은 시야를 넓히는데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5년에서 10년에 이르는 대 선배들은 언제나 내 손을 붙들고 술집을 찾았고, 점심 시간에 식사가 끝나면 그들의 사무실에 데려가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합참은 병사 숫자보다 장군 수가 더 많다 할 정도로 장군들이 많았다. 그들의 모습을 가까이 지켜보면서 나는 역시 내가 사관학교 시절에 독서를 통해 생각했던 자유분방한 프리랜서의 인생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일찌감치 장군이 되는 코스를 포기하고 공부를 하기로 결심했다. 전방생활, 전속부관, 월남전투, 합참생활 등 공부와는 동떨어진 군대생활을 하다가 사관학교를 졸업한지 9년 만에 공부를 다시 시작하는 것이었다.




              2003. 5.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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