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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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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사랑

"이보라, 창구 학생, 노가 알다시피 우리 한식이 한놈이 공부를 못해써, 오디 마땅한 학생 하나 가정교사로 소개 해보련?"

한식이 어머니의 말에는 약간의 이북 사투리가 남아 있었다.

"우리 반에 쬐끄만한 녀석이 하나 있는데 머리가 천재예요, 쬐끄맣다고 얕보시지 말고 한 번 시켜보세유"

빨강 가죽가방에 화장품을 채워 가지고 가정을 방문하면서 학비를 버는 창구의 말이었다. 그는 나보다 나이가 서너 살 위지만 변두리 고등학교 야간 반 동창이었다.

한식이는 어머니가 일나가 있는 동안 동네 아이들과 어울리는 데 익숙해 져서 한 시간 이상 진득하게 앉아 있지를 못했다. 나는 야간 고등학교 2학년이었지만 나보다 나이가 한 살 더 많은 한식이는 중학교 3학년이었다. 함수, 기하, 인수분해 등 간단한 내용들을 가르쳐 주지만 그의 머리는 형광등처럼 답답했다. 답답한 것은 한식이도 마찬가지였다. 그럴 때마다 그에게는 장난끼가 발동했다.

"야, 요 쬐끄만 대가리가 왜 그렇게 좋으냐" 하면서 나의 머리를 툭툭 건드렸다.

"야 임마, 지만원, 내 팔좀 만져봐, 돌같이 딴딴하지? 자-식, 팔이 이게 뭐냐, 야, 임마 누가 너 건드리면 나한테 일러, 이 주먹 한방이면 다 날아간다구, 알았어? 자식, 와르바시처럼 가느다란 요 팔 가지고 뭘 하냐?"

당시 용두동에는 청계천을 가로지르는 나무다리가 하나 있었는데 물에 썩지 말라고 검은 콜탈을 발라 놓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검정다리라 불렀다. 다리 밑에는 염색 업자들과 양하치라 불리는 넝마주이들이 어우러져 살았다. 다리 밑을 빼곡이 메운 육중한 가마솥들에서는 언제나 퀴퀴한 수증기 냄새가 인근 마을에까지 퍼져나갔고, 각목으로 묶여진 건조물에는 염색된 천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남 보기엔 초라하고 불행해 보이지만 밤이 되면 이들이 살고 있는 거적대기 집들에서는 깔깔대는 웃음소리가 끊기질 않았다. 용두동 일대의 길바닥은 검고 미세한 흙먼지로 다져져 있어서 바람이 불 때마다 검은 먼지들이 길바닥 위에 얕게 깔려 구름처럼 이리저리 떼지어 날아다녔고, 슬리퍼를 신고 다니는 사람들의 뒤꿈치에는 검은 얼룩이 덕지덕지 올라붙었다.

한식이네 옆집에는 이십칠 세의 여인이 어린 두 남매를 데리고 살면서 한 식구처럼 지내고 있었다. 원산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월남하여 결혼을 했지만 불과 5년만에 남편을 잃고, 일곱 살 난 딸아이와 다섯 살 난 사내 이이를 데리고 셋집에 살고 있었다. 돈 많은 고무신 공장 사장을 만나 팔자를 고친 한식이 어머니는 말투에서부터 무식함이 풍겼지만 그 여인에는 어딘가 귀티가 배어 있었다.

내가 공부를 가르칠 때마다 그녀는 거의 매일 같이 학습과정을 지켜보면서 한식이에게 보충설명을 해주기도 했고, 한식이가 장난을 칠 때마다 주의를 주기도 했다. 그녀가 매일 같이 학습과정을 지켜본 것은 어린애처럼 보이는 내가 우악스런 한식이에게 놀림을 당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녀는 또한 한식이에게 진전이 없으면 나의 일자리도 끝이 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설명해주는 내용을 다른 방법으로 한식이에게 아주 열심히 설명해 주었다.

그 가정 교사 자리도 겨우 6개월만에 끝이 났다. 한식이네가 더 좋은 곳으로 이사를 가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한식이를 휘어잡을 수 있는 나이든 가정교사를 원하는 것 같기도 했다. 먹고 자는 문제를 한식이네 집에서 해결해오던 나는 갑자기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돼버렸다. 허무하고 허전했다.

내가 다니던 한영고등학교 야간반은 용두동 미나리 밭 한 가운데 지어진 판자집 건물이었다. 판자집은 비가 와도 썩지 말라고 검은 콜탈을 발라 우중충해 보였다. 어둠이 짙게 깔리기 시작하면 미나리 밭에는 검고 음산한 기운이 퍼지기 시작했고 그 음산한 기운은 마치 이 검은 판자집에서부터 퍼져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오갈 데 없어 난감해 하는 내게 그 여인은 정성껏 저녁밥을 차려주었다. 맛있게 먹고 있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마음 아파해 했다.

"얘, 만원아. 밥과 빨래는 내가 해주고 싶다. 당분간 학비까지도 대줄 수 있다. 하지만 잠자리만은 어찌 해볼 도리가 없구나. 어떻게 하면 좋겠니?"

의외의 따뜻한 말에 너무나 고마워서 눈물이 핑 돌았다.

"고맙습니다. 정말로요"

"당장 오늘밤은 어디서 잘래?"

"문제없어요. 학교 교실에 가서 자면 돼요. 선배들이 불을 켜놓고 밤새워 공부를 하는 것 같던데요"

"너 정말 그럴 수 있겠니?"

"그럼요. 그런 것쯤은 문제도 없어요"

세 명의 학교선배들이 교실 하나를 차지하여 입시 공부를 하고 있었다. 교실 앞을 지나가자 선배들이 나를 불러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너 벌써부터 입시 공부를 시작하는구나? 참 착실하다 야. 그래, 그래야 돼"

선배들이 있는 바로 옆 교실을 선택했다. 유난히 무서움을 타기 때문이었다. 멀리 가로등에서 힘겹게 비쳐오는 엷은 불빛이 또 하나의 위안이 됐다.

불꺼진 교실. 검은 색이 칠해진 네 개의 책상을 이어놓고 책가방을 베개 삼아 고단한 몸을 의탁했다. 선배들이 옆방에 계속해서 있어 주리라 믿으면서! 교실 바닥은 딱딱하게 마른 진흙이었고, 앉을 때마다 이리 저리 움직이는 책걸상 다리에 패여 마치 바다 수면을 정지시켜 놓은 것처럼 울퉁불퉁했다. 몸을 뒤척일 때마다 책상이 기우뚱거려 여간 불편하지가 않았다.

엄마의 모습이 떠올랐다. 주루룩 뜨거운 눈물이 눈가로 흘러내렸다. 마치 여러 시간을 울고 난 어린아이처럼 온몸으로 흐느꼈다. 어린 나이에 홀홀 단신 서울에 올라와 다급한 현실을 뚫고 나가면서 겪었던 설움과 차곡차곡 눌러두었던 그리움이 일순간에 북받쳐 올랐다.

긴장했던 신경들이 파르르 떨면서 한올씩 한올씩 풀어졌다. 지칠 대로 지쳐버린 나의 육신에 어느 듯 몽롱한 기운이 퍼져나갔다.

밤중이었다. 요란한 비바람이 창문을 두드렸다. 세찬 바람이 귀신 소리를 내면서 창 틈 사이로 들어와 교실 바닥을 맴돌았고, 교실 안에 있는 책상들이 이리저리 움직이며 덜거덕거렸다. 귀신이 눈치를 채지 못하게 눈을 최소한으로 가늘게 떴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할 만큼 온몸이 경직됐다. 움추릴수록 무서움이 더 크게 엄습해왔다. 도저히 새벽까지 견딜 수 없었다.

다급하게 궁리를 했다. 어느 창문을 열어야 단번에 열릴까. 만일 시도했던 창문이 단번에 열리지 않으면 귀신이 덤벼들지도 몰랐다. 이를 악물고 온힘을 다해 몸을 일으켰다.

쏜살같이 창문으로 다가가, 미다지 창문을 열어 젖혔다. 창틀이 빗물에 불어 움직이지 않았다. 필사적인 힘으로 다른 창문을 열어 젖혔다. 어디로 뛰는지 나도 몰랐다. 가로등 불빛에 은가루처럼 휘날리는 빗줄기가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어둠 속에서는 무서워서 속력을 다했고, 가로등 밑에서는 한참씩 쉬었다.

아침에 눈을 떴다. 그 여인 옆에 누워 있었다. 그녀의 어린 남매와 나란히.

그녀의 셋방에는 연탄식 부뚜막이 설치돼있고, 그 부뚜막 위에는 물 담긴 양은솥이, 화력이 약한 연탄불 위에 걸려있었다. 나는 그 부뚜막 위에 잠이 들어 있었다.

나를 보내놓고 마음이 놓이지 않던 그녀 역시 비바람이 세차게 불어 치자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한밤중에 이상한 느낌이 들어 혹시나 하고 쪽문을 열어보니 내가 양은솥 옆에 새우처럼 몸을 틀고 잠들어 있었다.

그 여인은 나를 옆에 뉘여 놓고 눈이 붓도록 울었다. 무의식 중에라도 내가 그녀의 집으로 달려온 것은 나의 의식 속에 이미 그녀에 대한 믿음이 자리하고 있어서였다

이튿날 그녀는 안집에 사정을 설명하고 당분간만 나를 데리고 있겠다고 양해를 구했다. 나는 밤마다 가위에 눌렸다. 식은땀을 너무 많이 흘려 속옷이 물에 담근 것처럼 흥건하게 젖었다.

그녀는 밤마다 몇 번씩 대야에 물을 떠다가 물수건으로 닦아주고 새 옷으로 갈아 입혔다. 그래도 나는 몰랐다. 설사 알았다 해도 어느덧 엄마같이 이물 없고 아름다운 그녀에게 비밀을 갖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동네 엿 공장에서 매일 같이 엿을 사서 내게 먹였다. 꿀 대신 엿이라도 먹고 빨리 회복하라고 했다. 누우면 온몸이 방바닥에 착 달라붙었고, 한 번 잠들면 송장처럼 늘어졌다.

계란형의 섬세한 얼굴선, 가늘게 흘러내린 목선, 투명하고 뽀얀 피부, 잔잔히 배어 나오는 윤기; 너무나 황홀하고 매력적이었다. 먹고 자는 문제가 인생의 전부였던 내겐 믿어지지 않는 꿈같은 세계였다. 그녀가 없던 어제는 지옥이었고, 그녀가 있는 오늘은 천국이었다. 그녀의 존재는 나의 정신적 신분을 하루아침에 바꾸어 놓았다. 그녀와 함께 온 세상을 날아다니며 나 좀 보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누나 이 콩나물국은 왜 이렇게 맛있어?"

"으응, 거기엔 비결이 있단다. 이다음에 장가들거든 색시에게 가르쳐 줘라. 먼저 콩나물을 참기름에 볶은 후에 물을 붓고 끓이면 이렇게 고소해 진단다"

"싫어, 난 이다음에 장가 안가고 누나랑 살 거야".

"니가 행여 그러겠다. 색시 얻으면 나 같은 건 못 본 척 할걸?"

내가 어느 정도 몸을 회복하자 두 사람은 각자의 과거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어쩌면 너는 어린 나이에, 눈 없으면 코 베 간다는 서울에 혼자 올라올 생각을 다 했니?"

"셋째형이 나보다 열 살이 더 많거든, 둘 째형이 가사를 꾸려갈 때에는 나보고 공부만 열심히 하라 했는데, 둘째형이 객지로 나가고 셋째형이 가사를 꾸려가면서부터는 나에게 곡갱이를 들려주는 거야. 화전 밭을 파라고"

"그래서?"

"화전밭을 파고 있는데 앞 동네 학교 스피커에서 국회의원 후보들이 연설을 한다고 방송을 하는 거야, 셋째형에게 잠깐만 갔다 온다고 했더니, 허파에 바람이 들면 안 된다며 못 가게 하는 거야, 아버지는 늙으시니까 형이 시키는 일에 반대는 못하시고 한숨만 땅이 꺼져라 쉬시는 거야, 곡갱이 질을 몇 번 밖에 하지 않았는데 손바닥에 물집이 생기지 뭐야, 쓰라리니까 곡갱이 자루를 잡을 수가 없는 거야, 그래서 형에게 손바닥을 보여주며 더는 못하겠다고 했어, 그런데 형이 뭐라고 말했는지 알아?"

"뭐래?"

"아파도 참고 계속 일을 해야 구덕 살이 잡혀 농부가 될 수 있대"

그녀가 가엽다는 듯이 나를 꼬옥 안아 주었다.

"그래서?"

"나는 마음속에 다짐했지, 형으로부터 탈출해야겠다고"

이야기를 듣는 동안 그 여인은 한숨을 쉬기도 했고, 대견스럽다는 듯이 내 얼굴을 들여다보기도 했다.

"엄마가 많이 보고싶니?"

"얼마 전까지도 그랬는데 지금은 학교에 가서도 누나만 보고싶어져, 그래서 학교가 끝나면 막 뛰어오는걸"

"정말?"

그녀는 어둠 속에서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나는 말 대신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스산한 가을날이었다. 하교시간에 비가 주룩 주룩 내리고 있었다. 울타리도 없는 학교였지만 운동장 한 끝으로 연결된 길목에 그녀가 우산과 반장화를 들고 서있었다. 콧날이 시큰할 만큼 행복했다. 이제 나도 외롭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 지만원, 이것 좀 신어봐, 맞을까 모르겠다".

"응, 꼭 맞아, 돈도 없는데 왜 이런걸 다 사왔어?"

그녀는 나를 그녀의 우산 속으로 끌어당겼고, 나는 그녀와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한쪽 팔로 그녀의 허리를 휘어 감았다. 스커트 벨트 위로 밀려난 연한 살집이 너무나 감미로웠다. 손가락에서 솟아나기 시작한 행복감이 온 몸으로 퍼져나갔다. 파여진 곳과 질척거리는 곳을 피해가며 걷는 동안 나는 그날 있었던 이야기들을 종알거렸다.

"누나, 오늘 학교에 멋쟁이 화학선생님이 새로 오셨는데 그 선생님이 나 보고 알프스 소년 같대, 알프스 소년이 뭐야?".

"응, 너처럼 얼굴도 희고 눈도 크고 해맑은 소년이지"

언제나 혼자였던 내게 이렇게 아늑한 품이 있다는 것은 세상을 다 얻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이외에 무엇이 더 필요하단 말인가. 사랑에 취하고 포근함에 도취해 걷고 있었다. 너무나 행복했다.

"얘, 지만원, 누나가 시집가도 너 혼자 학업을 계속할 수 있겠니?"

청천벽력 같은 말이었다. 가슴이 답답해지더니 이내 뻥 뚫린 것처럼 허전했다. 눈물이 고였다.

"누나가 행복해진다면 시집가도 돼".

기어가는 소리였다. 약간의 침묵이 흐른 후 그녀는 "정말?" 하면서 허리를 굽혀 장난기가 서린 눈으로 내 눈동자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누나 시집가는 게 그렇게 싫으니?".

나는 말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시집가면 두 사람 다 미워질 거야".

"아냐, 난 시집안가. 네가 어쩌나 보려고 한 번 해본 소리야, 너같이 예쁜 남자가 어디 또 있겠니? 누나는 예쁘고 귀여운 만원이한테 완전히 반했는걸 ".

"정말?, 그럼 새끼손가락 걸고 약속해, 그런데 앞으론 그런 장난치지마, 간 떨어 질 뻔했잖아"

그녀는 내 어깨를 더욱 더 끌어 당겼다.

"누나, 우리 둑으로 해서 걸어가자, 난 비오는 날이 너무 좋더라, 그리고 우린 장화도 신고 우산도 있잖아, 그러니 싫것 신고 뽑내봐야지"

마을 복판을 지나 용두동 둑을 걸어 집에까지 오는 데에는 30여분이면 되었다. 그러나 그 두 사람은 그 길을 한 시간에 걸었다.

그날 밤, 나와 그녀는 여느 때처럼 얼굴을 마주 보고 누웠다. 그녀는 창문을 향해 얼굴을 두었고, 나는 창을 등지고 누웠다. 골목길 입구에 희미하게 켜진 가로등이 투명한 유리창을 뚫고 들어왔다.

유리창에 묻은 물방울이 가로등 불빛에 실려와 그녀의 뽀얀 얼굴에 연한 반점을 뿌렸다. 그녀의 얼굴이 마치 검은 망 모자를 쓴 서양의 귀족 부인 같이 아름다워 보였다. 나는 한동안 그녀의 아름다움에 도취돼 꼼짝도 하지 않았다.

"너는 참 볼수록 예쁘다. 어쩌면 눈이 그렇게 초롱초롱하냐?, 너는 입술도 참 예쁘고, 어쩌면 턱도 그렇게 동그라니 예쁘냐?"

"정말?"

"너는 하도 예뻐서 이 다음에 여자들이 꽤 많아 질 거다"

"에이! 나는 누나가 제일 예쁘더라. 누나! 왜 큰길에서 한식이네 집으로 꺾어지는 골목 있지? 그 골목에 들어서면서 두 번째 집에 여학생이 하나 있거든, 한식이네 다닐 때에는 그 여학생이 그렇게 예뻐 보이더라? 그런데 지금은 아무 것도 아냐"

그녀는 "너?" 하면서 나의 팔뚝을 꼬집었다.

"그 다음은?"

야릇한 질투의 감정을 누르고 그녀는 또 물었다.

"음. . . 중학교 1학년 때, 우리 반에 영자라는 애가 있었는데 바로 내 옆자리에 앉았었거든, 그런데 그 애의 눈은 약간 근시라서 조르개를 오므릴 때 더욱 예뻐 보였거든, 그리고 그 애의 눈꺼풀은 아주 얇고 뽀얘서 마치 눈 주위에서 아지랑이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것 같이 이름다웠어"

"말은 걸어봤니?"

"아니. 말은 못 걸고 관심만 끌려고 했지"

"뭘 어떻게 했는데?"

"그 때 시골에서는 곤색 교복을 입었거든, 그 교복에 날을 세워 입고 다녔어. 나 다림질 잘한다?"

그녀의 숨결이 빨라졌다.

"너 이제 보니 바람둥이 소질이 아주 많구나?"

"누나, 내가 바람둥이 되면 이 세상 남자 모두가 다 바람둥이 되겠다"

이내 그녀의 겨드랑이를 간지렀다.

"그 말 취소하지 않으면 밤새도록 간지를 거야?"

"알았어, 알았어, 취소할게, 취소할게, 그런데 너 정말 누나가 그렇게 예뻐 보이니?"

"음! 너무"

그녀는 손가락으로 나의 입술을 좌우로 애무해주었다. 나는 그녀의 손끝이 만들어내는 감미로운 촉감에서 새로운 세계를 체험했다.

나는 이제 그녀에 대해 알고 싶어졌다.

"이제 누나 얘기 좀 해 주라!"

그녀는 북한에서 학교 다닐 때에 있었던 많은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남학생으로부터 귀한 만년필을 선물 받아 뜨게 실로 만년필 집을 만들어 만지작거렸다고도 했다. 석양이 찾아오면 남고생과 손을 잡고 해당화가 피어있는 바닷가 언덕을 수없이 거닐면서 연애했던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그때 그녀의 느낌이 얼마나 짜릿하고 설레었는지에 대해서도 묘사해 주었다.

그녀가 추억을 반추하는 동안 나는 동그랗게 그어진 그녀의 세계에서 밀려나 있었다. 갑자기 그녀가 남같이 멀어졌다. 쓸쓸했다.

"야! 지만원, 노래 하나 가르쳐 줄까?"

성숙한 그녀가 나의 그 미세한 감정을 놓칠 리 없었다. 유난히 빨간 나의 입술은 뾰루퉁 하게 튀어나왔고, 가늘게 뜨여진 눈틈에서 쏟아져 나오는 광채에는 질투의 감정이 역력히 배어있었다. 그녀는 나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달랬다.

"너 혹시 질투하는 것 아니니?"

"응, 질투 나. 이제 옛날 추억 같은 건 말하지 마, 나만 예쁘다고 말해"

나는 그녀의 팔을 잡아다가 베개를 베고는 그녀의 턱밑에 얼굴을 묻었다.

"이래도 한 세상, 저래도 한세상, 도화강변에 나부껴 우는 꽃, 꽃은 피어서 만발이 되건만, 우리의 갈 길은 죽음의 길이다"

다뉴브강의 물결에 얹혀진 가사였다. 이 노래 속에는 사랑하지만 이루지 못했던 어느 청춘남녀의 슬픈 최후가 담겨있다고 했다.

두 사람은 매일 같이 이렇게 행복한 밤을 기다렸다. 나의 "오늘"은 오직 그녀와 같이하는 순간을 위해서만 의미가 있었다. 그 때의 창문 유리는 채색되지 않은 투명한 유리였다. 그 유리문은 달빛, 별빛 그리고 가로등 불빛을 조금도 여과시키지 않고 통과시켰다. 그녀의 반짝이는 눈, 뽀얀 얼굴, 동그랗게 마무리된 턱 선은 달빛과 가로등 불빛에서 빛나도록 아름다웠다. 하루가 더해질 때마다 두 사람의 설레임은 몇 배씩 증폭돼 갔다.

그후 얼마 안돼서 나는 담임선생님의 주선으로 을지로 3가에 있는 어느 무역회사에 급사로 취직해 사무실에서 기거했다. 그녀 역시 안집과 이웃의 눈 때문에 나를 무작정 머무르게 할 수도 없었다. 매일 밤 하교시간이 되면 그녀가 길목에 나와 있었다. 학교에서 버스 정류장에까지 가는 데에는 20분이면 되었지만 두 사람은 일부러 둑을 따라 한 시간 이상씩 걸었다.

여러 대의 을지로 행 버스가 앞에 와 섰지만 두 사람은 그냥 보냈다. 버스 정류장에서 손을 잡고 있는 시간이 학교에서 걸어온 시간보다 더 길었다. 버스에 올라서도 그녀만 바라봤다. 손을 흔들어주는 그녀의 모습이 살아지면 내 가슴은 반사적으로 턱밑까지 흐느껴졌다. 그녀 없는 세상은 암흑이었다. 그녀는 내게 희망이요 유일한 보금자리였다.

영원한 행복은 없었다. 가을철의 주말이었다. 그녀는 뚝섬강 건너에 사는 언니 집에 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상하게도 그날만은 그녀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깔리고 비장해 보였다. 나는 전철을 타고 그녀를 뚝섬에까지 바래다주었다. 전차가 땡그랑 소리를 내면서 시골길을 달렸다. 손을 꼬옥 잡고 있었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거대한 심연이 가로 놓여있는 것만 같았다. 이따금씩 뺨과 뺨을 의식적으로 맞대보지만 마음은 납덩이 같이 무겁고 답답했다.

"왜 이럴까?"

이윽고 내 가슴에 얼마 전 하교 길에서 누나가 던졌던 농담이 떠올랐다.

'아하! 그 때의 그 농담이 진담이었구나'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목이 메이고, 가슴이 울렁거렸다. 전철 안에 있던 30대와 40대 어른들이 갑자기 미움의 대상으로 부각됐다.

'바로 저 정도의 남자들이 우리 누나를 가져가겠지?'

두 사람은 뚝섬 역에서 내려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둑 위를 힘없이 걸었다. 가끔씩 주고받는 말은 있었지만 가슴속까지 스며든 말은 없었다. 내가 그녀를 선착장에까지 바래다주면 그녀는 다시 나를 전차 역까지 바래다주었다. 두 손을 꼭 잡고 걸었지만 가슴은 여전히 답답하기만 했다. 지친 나머지 두 사람은 둑과 모래사장이 맞닿는 양지바른 곳에 나란히 앉았다.

강 건너에서는 언니가 그녀를 기다린다고 하면서도 그녀는 나룻배를 번번이 그냥 보냈다. 강 건너에 사는 언니는 부자로 잘 사는데 참외와 수박 농사를 짓는다고 했다. 드디어 나룻배가 석양빛을 받으며 마지막 손님을 기다렸다. 두 사람은 손 깍지를 낀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조심해서 가, 밥 잘 챙겨 먹고"

'이 엄청난 순간에 겨우 이 말 밖에 할 수 없는 것인가.....?'

잡혀 있던 손이 허전해 지는 순간 눈물이 주루룩 흘렀다. 그 눈물 속에서 그녀는 원망 어린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손바닥으로 눈물을 아주 소중하게 훔쳐주었다.

나룻배가 잔잔한 물결을 남기며 멀어져 갔다. 강가의 온갖 가을 풍경이 허공에 떠있는 허상들처럼 쓸쓸해 보였다. 그날 따라 파들거리는 미루나무 잎들이 유난히도 반짝거렸다.

"이래도 한세상, 저래도 한세상, 도화강변에 나부껴 우는 꽃, 꽃은 피어서 만발이 되건만, 우리의 갈 길은 죽음의 길이다".

이제는 이 노랫말의 슬픔이 내 것이 됐다. 나는 이제 어둠 속에 버려진 고아다. 그녀의 얼굴을 다시 볼 수 없는 것이 참을 수 없는 슬픔이었다.

'그녀 없이 어떻게 살지? 보고 싶다. 너무 너무. . . .'

그녀에 대한 그리움이 텅 빈 가슴을 점점 더 까맣게 태웠다. 아팠다. 외로움, 불안, 초조, 공포로 얼룩졌던 내 가슴에 그녀는 사랑의 환희와 그리움이라는 새로운 나이테를 보태주었다.

전차 역을 향해 터벅터벅 발길을 옮겼다. 굵은 눈물이 쉴 새 없이 매달렸다가 뺨을 타고 흘렀다. 멀리 전차 역에서 비쳐오는 불빛이 그 출렁이는 눈물에 오색 영롱한 무지개를 그리고 또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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