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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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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5장: 광란의 해방구 5.18의 광주) 1. 5월 18일,시위첫날의광주


                                                              제5장: 광란의 해방구 5.18의 광주  

                                                               1. 5월 18일, 시위 첫날의 광주
    
                                                                                 상황 개요    

5월 18일 0시를 기해 전국비상계엄이 선포되고, 계엄포고 제10호로 전국 대학에 휴교령이 내려겼으며 중요 대학에 계엄군이 주둔함에 따라 극심했던 학원소요는 진정되어 전국이 평온을 되찾게 되었다. 그러나 광주지역만큼은 격렬한 시위사태가 지속되었다. 전북 금마에 있던 7공수 2개 대대가 전남대와 조선대에 각 1개 대대씩 진입하여 31사단장인 전남출신 정웅 소장의 작전 지휘 하에 들어갔다. 정동년 등 고소자들은 신군부가 특별하게 광주에만 공수부대 2개 대대를 보냈다고 주장하지만 계엄포고 10호에 의해 배치된 공수부대 현황을 보면 광주에만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1공수여단 소속 4개 대대는 연세대, 서강대, 홍익대에 배치했고, 5공수 소속 4개 대대는 모두 고대에 배치했고, 11공수 소속 3개 대대는 모두 동국대에 배치했고, 13공수 소속 2개 대대는 성대에, 9공수 소속 3개 대대는 서울대 중앙대 숭전대에, 7공수 4개 대대는 전남대, 조선대, 전북대, 충남대에 각 1개 대대씩 배치했다. 고대에 4개 대대, 동국대에 3개 대대, 성대에 2개 대대가 배치되었던 것에 비하면 전남대와 조선대에 각 1개 대대씩을 배치한 것은 당시 계엄사가 광주를 그다지 크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나마 7공수 2개 대대는 겨우 600명 수준에 불과했다.

오전 9시경, 7공수여단 제33대대가 주둔하고 있던 전남대 정문에 2백50여 명의 대학생이 몰려와 ‘비상계엄 해제하라’ ‘공수부대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며 가방 속에 숨겨온 돌을, 부동자세로 서 있는 공수대원들에 던져 7명의 공수대원들에 피를 흘리게 하는 부상을 입혔다. 공수대가 학생들을 향해 진격하자 학생들은 미리 예정한 대로 광주의 중심가 금남로와 충장로 쪽으로 도주하여 파출소를 파괴하고 불태우며 경찰들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이에 경찰들은 도망가기에 바쁜 상황으로 내몰리게 되었다. 광주에서 의외의 사태가 발생하자 최규하 대통령은 매우 빠르게 움직여 이날 12시에 대국민성명을 발표했다. 나라 사정은 어려워 가는데 광주시위가 불순한 정치세력들에 의해 유발되어 점점 악화돼 가고 있으니 진정하라는 경고와 당부의 뜻을 전한 것이다. 시위가 난폭해짐에 따라 경찰로서는 도저히 폭력 시위를 당해낼 수 없게 되자, 안병화 전라남도 경찰국장은 전라남도 계엄분소장인 윤흥정 전교사 사령관에게 계엄군의 출동을 요청했다. 이와 동시에 계엄사령부와 2군사령부 역시 분주하게 움직였다. 윤흥정 전교사 사령관은 정웅 31사단장에게 전남대와 조선대에 주둔중인 7공수여단 2개 대대를 시내로 출동시키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로써 시위진압 임무는 오후 4시경부터 31사단장 정웅에게 넘어갔다. 공수대의 특성과 시위진압 작전에 서투른 정웅은 공수부대 2명의 대대장들에게 시위대를 쫓으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 아니라 모든 길목을 막고 주동자를 전원 체포하라는 무모한 명령을 내렸다. 기계와 같은 공수대원들은 하늘같은 2성 장군이 내린 명령에 따라 오후 4시경부터 4-5명 단위로 쪼개져 시내의 주요 길목을 차단했다. 대규모 시위대는 4-5명 단위로 서 있는 계엄군을 향해 돌과 화염병 등으로 공격을 했고, 수적으로 열세한 처지에서 피를 흘리게 된 계엄군 병사들은 보복 심리에서 무자비할 정도로 진압봉을 휘둘렀다.
광주시내에는 첫날부터 경상도 군인들만 뽑아 전라도의 씨를 말리러 왔다거나 여학생의 유방을 대검으로 도려냈다는 등 기상천외한 유언비어들이 나돌았고, 이 거짓 유언비어를 듣고 흥분한 시민들은 점점 더 많이 중심가로 모여들어 시위대가 공수대원들에 매 맞는 모습을 보게 되었고, 이로 인해 더 많은 유언비어가 확대 재생산되어 시위대의 규모를 순식간에 키웠다. 악성 유언비어는 분노와 폭력을 유발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었으며 광주의 첫날에 퍼진 유언비어는 아래와 같았다.
화려한 휴가라는 명칭 하에 데모 진압 작전을 시작했다.
여학생을 발가벗긴 채 세워놓고 대검으로 유방을 도려내어 죽였다.
경상도 군인들이 전라도 사람들의 씨를 말리려 왔다. 벌써 40명이 죽었다.

전두환이 공수부대를 동원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투입된 공수부대원들을 이틀씩이나 굶기고 술과 환각제 등을 복용시켜 광주에 투입했다.

공수부대원이 임신한 여자의 배를 대검으로 찔렀다.

죽은 시민을 불도저로 밀면서 처리하는 과정이 TV에 나왔다.

대검으로 시민의 머리 가죽을 벗겨냈다.
  
특히 경상도 군인들만 뽑아 전라도의 씨를 말리러 왔다는 종류의 유언비어는 묵은 지역감정에 휘발유를 뿌려 광주시민들을 분노시켰다. 시위대가 갑자기 10,00여명 단위로 불어나 한일은행 및 도청 앞에서 시위를 계속하면서 자정까지 해산하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계엄군 15명, 경찰관 310명이 부상을 입었고, 계엄군은 시위학생 615명을 검거했다. 진실이 위와 같은 데도 불구하고 광주사태의 주모자요 영웅이라는 윤상원은 10시 30분경 불온서적을 취급하는 녹두서점 김상집씨에게 전화를 걸어 “전대 정문 앞인데 공수부대원들이 학생들을 무차별살상하고 있다”며 정반대로 이야기했고, 이 거짓말은 녹두서점을 통해 전국 대학가 운동권으로 퍼져나가 그대로 대자보로 제작되어 대학가 벽보에 붙었다. 5월 19일, 윤상원이 민주투쟁회보 이름으로 뿌린 삐라는 아래와 같은 글귀로 시작 된다. 5월 19일 뿌려진 이 삐라의 내용은 5월 18일에 대한 내용이었을 것이며, 5월 18일의 실제 상황과 이 삐라 내용과는 상당한 괴리가 있다. 5월 18일 공수대가 총칼로 찔러죽이고 몽둥이로 패서 트럭에 실은 적이 없었건만 윤상원은 아래와 같이 거짓 선동의 삐라를 살포했다.

광주 애국시민 여러분! 이것이 웬 말입니까? 웬 날벼락이란 말입니까? 죄 없는 학생들을 총칼로 찔러죽이고, 몽둥이로 두들겨 트럭에 실어가며, 부녀자를 백주에 발가벗겨 총칼로 찌르는 놈들이 도대체 누구란 말입니까? 이제 우리가 살 길은 전시민이 하나로 뭉쳐 청년학생들을 보호하고, 유신 잔당과 극악무도한 살인마 전두환 일파와 공수특전단 놈들을 한 놈도 남김없이 쳐부수는 길뿐입니다. 우리는 이제 다 보았습니다. 다 알게 되었습니다. 왜 우리의 젊은 학생들이 그렇게 소리 높여 외쳤는가를. 우리의 적은 경찰도 군도 아닙니다. 우리의 적은 전국민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는 바로 유신 잔당과 전두환 일파들입니다. 죄 없이 학생들과 시민들이 수없이 죽었으며 지금도 계속 연행당하고 있습니다. 이 자들이 있는 한 동포의 죽음은 계속될 것입니다.

                                                        5월 18일의 상세 상황

이후의 상황일지는 계엄군당국, 중앙정보부, 치안본부, 5.18측 자료, 검찰자료 들을 종합하여 정리한 것이다.  

5월18일은 일요일, 날씨는 맑았다. 5월18일, 전남대 및 조선대에서는 200여명의 학생이 전국계엄령 확대에 따른 향후 활동방향을 논의하고 있었다. 33대대와 35대대는 회합 중이던 주도 급 학생 60여명을 검거하여 수사기관에 인계하고 경계 임무에 임하고 있었다. 아침 9시경, 전남대 정문에는 학생들이 속속 모여들고 있었다. 사전에 이들에게는 “만일 휴교령이 내려지면 오전 10시에 전남대 정문에 모여 시위를 한다”는 방침이 하달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09:30분 경, 학생 수가 200명(5.18측 자료는 500명) 정도로 늘어나자 이들은 “계엄을 해제하라” “전두환은 물러가라” “휴교령을 철회하라”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책가방에 몰래 숨겨온 돌을 계엄군을 향해 던졌고 계엄군은 한동안 부동자세로 서 있었다. 계속해서 돌을 던지자 계엄군은 함성을 지르며 학생들에게 돌진하여 겁을 주려 했지만, 학생들은 죽어라 돌을 던졌고, 이 돌에 맞아 7명의 군인들이 피를 흘리는 부상을 입었다. 동료전우들이 공격을 받고 피를 흘리자 감정이 폭발한 다른 공수대원들이 도주하는 학생들을 끝까지 추적하여 진압봉으로 가격하는 감정적 충돌상황이 벌어졌다. 이처럼 광주에서 먼저 공격한 측은 학생이었고, 가장 먼저 부상을 당한 측은 공수부대원들이었다.  

오전 10:00시, 대구에 주재하는 진종채 2군사령관은 전남대에서 충돌이 있었다는 보고를 받고 현지 확인 차 광주를 방문했다. 10:30분경, 화가 난 계엄군 병사들은 전남대 후문에서 버스를 내리거나 타는 학생들 중에서 수상하게 생각되는 학생들을 연행하여 꿇어앉혔으며, 이런 과정에서 반항하며 대드는 학생들에게 진압봉을 사용했다. 공수부대원들에게 매를 맞고 쫓겨난 학생들은 감정이 격화된 상태에서 도청 앞에 모이기로 한 사전 약속에 따라 시내로 진입했다. 오전 11시경, 광주역, 호남전기, 광주공원, 광주우체국 등에 모인 시위학생 수는 1,000여 명이나 되었고, 이들 중 일부가 충장로 파출소에 투석하여 유리창 9매를 파손시켰다. 오전 11:50분, 카톨릭센터 및 한일은행 앞에 1,000여 명의 학생들이 모여 연좌데모를 하면서 “계엄을 해제하라” “전두환 물러가라” “김대중 석방하라” 등의 구호를 연창하다가 경찰의 진압으로 해산됐다.

12:30분, 광주학생회관 및 한일은행 앞에 학생 500여명이 시가지를 돌며 시위하면서 “도청 앞에서 시민이 다 죽어가고 있다”는 유언비어를 퍼트렸다. 당시의 전남대 학생회장은 박관현이었다. 그는 서울 학생회 간부로부터 전화 연락을 받고 무등산에 숨어있었다. 누군가가 “박관현이 계엄군에 잡혀 죽었다”는 유언비어를 퍼트렸고, 이로 인해 학생들은 더욱 분노했다. 박관현(당시 27세)은 5월 14일부터 16일까지 열렸던 전남도청 앞 집회를 주도한 혐의로 수배된 뒤 1982년 4월에 투옥되어 단식투쟁을 벌이다 10월 12일에 숨졌다. 12:45분, 학생 20여명이 “전두환 물러가라” “김대중을 석방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산수파출소에 투석하여 유리창 20매가 파손됐고, 13:20분, 학생회관 앞에서 점심 식사를 하던 전경들이 학생들이 돌을 던지며 접근하자 황망히 도주했다. 그 사이에 시위대는 경찰의 페퍼포그 차를 전복시키고 화염병으로 방화하여 전소시켰다.
  
14:00시,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전교사 사령관 윤흥정에게 광주만이 유일하게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빠른 시간 안에 진압을 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이 명령을 받은 윤흥정 전교사 사령관은 31시단장 정웅에게 병력투입을 지시했다. 한편 서울에 있는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대응 병력이 2개 대대 600여 명에 불과한 사실을 주목하고, 김재명 육군본부 작전참모에게 1개 여단을 광주로 증파하는 계획을 세우라고 명령했다. 김재명 장군은 정호용 특전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어 어느 부대를 차출하는 것이 좋겠느냐고 상의했고, 이에 정호용 사령관은 수경사 작전통제 하에서 동국대학에 천막을 치고 있는 11여단이 좋겠다고 조언했다. 1개 공수여단을 광주에 보내야 한다는 것은 계엄사령관이 결정하지만, 어느 여단을 뽑아서 보내야 좋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특전사령관의 의사를 존중해야 하는 것이다. 14:15분, 정웅 사단장은 500MD 헬기를 타고 전남대 33대대장과 조선대 35 대대장에게 날아가 지시를 내렸다.

지금 전교사 회의에 갔다 오는 중인데 오면서 보니까 광주 시테가 난리가 났다, 경찰은 완전히 수세에 몰려 있는 것 같다. 33대대는 금남로 아래에서 유동 삼거리 방향으로 병력을 투입해서 시위대를 압축하라. 도청에서는 경찰이 시위대를 차단하고 있으니 35대대는 금남로를 중심으로 좌우측 도로의 주요 목을 점령하고 있다가 금남로로부터 빠져나오는 시위대를 전원 체포 연행해서 조선대학교로 호송하였다가 헌병대에 인계하라. 죽음을 무릅쓰고 시위를 진압하라.

14:25분, 유동3거리에 학생 300여 명, 광주공원에 학생 300여 명이 시위를 했다. 14:40분, 금남로 일대에 1,500여 명으로, 충장로 일대에는 1,600여 명으로 불어난 시위대가 경찰을 향하여 깨어진 보도블록과 음료수 병을 던졌다. 15:00시, 육군본부 작점참모부장 김재명 장군은 11여단에 ‘광주로 이동하여 2군사령관의 작전지휘를 받으라’는 작전명령을 하달했다.
15:30분, 사태가 급박하게 돌아가자 정호용 특전사 사령관은 김재명으로부터 구두로 받은 작전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동국대에 주둔하고 있는 11공수여단을 방문했다. 7공수 2개 대대가 광주에서 고전을 하고 있으니 광주로 가라는 육군본부의 작전명령을 하달한 것이다. 최웅 여단장은 61대대 제1지역대(48명) 병력을 선발대로 뽑아 16:30분에 성남비행장을 출발하도록 조치했고, 이때에 여단작전참모를 동행케 했다. 61대대 잔류 병력과 62 및 63대대는 17:00에 열차에 올라 청량리역을 출발했다. 7공수 2개 대대에 이어 11공수 3개 대대가 5월18일 광주를 향해 달려간 것이다.

통상 공수여단은 4-5개 대대로 구성돼 있고, 1개 대대는 4개 지역대, 1개 지역대는 4개 중대로 편성돼 있다. 전방의 보병중대 병력은 130명 정도로 편성돼 있지만 공수부대 1개 중대는 장교 2명에 하사관 10명, 겨우 12명으로 구성돼 있다. 1개 중대 병력이라 해야 군용 트럭 1대 분에 불과한 것이다. 15:30분, 광주학생회관 앞 학생들이 갑자기 극렬해 지면서 경찰 가스차에 화염병을 투척했고, 시민들에게 합세해 달라 호소했다. 이 때 이들이 사용한 유언비어는 “공수부대가 화려한 휴가라는 명칭 하에 데모진압적전을 개시했다”는 것이었다. 15:40분, 공수 제33대대 병력 302명(35/267:장교/하사관)은 전남대를 출발하여 유동 삼거리를 거쳐 금남로로 이동했다. 33대대병력이 금남로에 도착하였을 때에는 2,000여명의 시위군중이 이미 경찰과 대치하여 투석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 때 권승만 33대대장이 자진해산하라고 선무방송을 하자 시위군중은 계엄군을 향하여 또 투석을 하기 시작했다. 거듭된 선무방송에도 불구하고 계엄군에 대한 투석과 화염병 공격이 멈추지 않자 33대대병력은 최루탄을 발사하며 시위 군중을 해산시키고 극렬 시위자 103명을 체포했다.

I5시 50분경, 7공수 35대대 병력 222명(26/196)이 충장로로 출동했다. 충장로에서는 900여 명의 시위군중이 동산 파출소에 투석을 하면서 공격을 하고 있었다. 김일옥 대대장이 시위대를 향하여 해산을 종용하는 선무방송을 했지만, 시위대는 파출소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고 계엄군에 대해서도 투석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3시간여에 걸친 공방전 끝에 시위대를 해산시키고, 극렬시위자 173명을 연행했다. 33 및 35대대는 16시30분경에 시위진압작전을 마치고 숙영지로 돌아왔고, 연행자는 31사단 헌병대에 인계했다. 공수부대 대원들은 M-16소총을 등에 메고, 방독면을 차고, 손에는 진압봉을 든 상태에서 진압대형을 유지하여 도청 방향으로 진군하면서 시위대를 압박하다가, 돌격명령이 내려질 때마다 함성을 지르며 시위대를 향하면서 진압봉으로 시위대를 타격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이는 시위대에게 겁을 주어 자진 해산시키는 방법으로 고안된 것이었다. 부마사태의 경우 이 정도의 진압이면 시위대가 흩어졌지만 광주 시위대는 돌과 화염병으로 맞섰다. 여기저기에서 공수대원들이 부상을 당하고 피를 흘리자 진압병들이 모두 흥분하게 되었다. 이들은 골목, 점포, 건물로 도망하는 시위대를 끝까지 추적하여 곤봉으로 가격한 후 체포를 했다. 어렵게 붙잡은 이른바 극렬시위대가 도주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 혁대를 벗기거나 상의 또는 하의를 벗기고, 머리를 땅에 박게 하는 등 군대식 기합을 주었다.

충장로 일대의 학생 600여 명이 도청방향으로 이동하면서 시위를 했다. 같은 시각, 동산동에서는 학생 시위대 300여 명이 “전두환 물러가라” “김대중 석방하라” “민주인사 석방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동산파출소에 투석 유리창 5매를 파손했다. 이에 경찰이 최루탄과 페퍼포그를 사용하여 시위대를 해산하려 했지만 턱없이 밀리기만 했다. 16:00시, 조선대에 있던 7공수 제35대대는 광주전화국, 광주일고 부근의 천교에 도착하여 시위 작전에 들어갔다. 이 때 1,000여 명의 시위대가 경찰들을 상대로 돌을 던지고 있었다. 35대대장 김일옥 중령이 나서서 귀가하라는 선무방송을 했다. 시위대는 흩어지기는커녕 더욱 격렬하게 돌을 던지며 달려들었다. 이에 대대장은 돌격명령을 내렸다. 진압대는 소총을 등에 메고, 무거운 방독면을 차고, 방석망을 내린 채 진압봉을 높이 쳐들고 시위대를 향해 돌격했지만, 투석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 이에 분노한 공수 돌격대들은 극렬 시위자들을 끝까지 추적하여 진압봉으로 가격하는 등 격렬하게 때리고 체포했다.      

16:30분, 11여단 작전참모가 61대대 1지역대(50명)를 선발대로 이끌고 성남비행장에서 수송기를 탔다. 이 선발대가 긴급히 수송기로 이동한 것은 그만큼 시위에 대한 위기감이 팽배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61대대 잔여병력과 62 대대 및 63대대는 17:00시 청량리역에서 열차편으로 출발했으며 11공수여단은 5월19일 00:00분부터 31사단장 정웅의 작전지시를 받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16:40분, 지산동에는 학생 300여 명이 모여 지산파출소에 투석한 후 난입하여 기물을 닥치는 대로 파손했다. 유리창 30매, 사이카 2대, 자전거 4대, 전화기 4대, 책상 5개 등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파괴했다.  

16:55분, 한국은행 앞에 학생 200여 명이 계엄군과 정식 대치했다. 한편으로는 계엄군을 향해 돌을 던지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유언비어들을 퍼트리면서 시민들에게 합세할 것을 호소했다. “경상도 군인들이 전라도 사람들의 씨를 말리러 왔다” “전두환이 공수부대를 동원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투입된 공수부대원을 이틀씩이나 굶기고 술과 환각제를 복용시켜 투입했다” “임산부를 대검으로 찔러 태아를 꺼내 길에 뿌렸다.” 17:05-19:30분의 도청 앞. 학생 수가 1,000여 명으로 늘어나면서 시위양상도 극렬해 졌다.  한편으로는 격렬하게 돌을 던지고 다른 한편으로는 유언비어를 퍼트리면서 시민들의 참여를 선동했다. “도청 앞에서 시민들이 다 죽어간다” “젊은이들을 팬티만 남기고 옷을 모조리 벗겼다” “학생들이 많이 죽었다"  군과 경찰은 극렬학생 149명을 검거했다.    

17:50분, 11여단 선발대 4개 중대가 광주공항에 도착하여 숙영지인 조선대로 가는 도중 시내 상가에서 위력시위를 선보였다. “시위를 중단하라”는 무언극(pantomime)이었다. 18:00시, 11공수여단 3개 대대를 5월19일 00:00분부로 31사단장이 작전통제하라는 지시가 하달되었고, 전남북 계엄분소는 광주시내 통금시간을 1시간 앞당겨 21:00-04:00시로 발표했다.  19:00시, 31사단장은 7공수 35대대장으로부터 시위진압을 완료했다는 보고를 받았지만 그 후에도 23:00시까지 한일은행, 노동청, 가톨릭센터 등지에서 시위를 벌이던 학생은 2,000여 명이나 되었다. 이 때 유언비어들이 퍼졌다. “여학생을 발가벗긴 채 세워놓고 대검으로 유방을 도려내 죽였다” “경상도 군인이 전라도에 와서 남녀 구별 없이 닥치는 대로 죽이고 있다” “공수부대원이 칼로 호박을 찌르듯이 닥치는 대로 사람을 찌르고 있다.” “젊은 놈은 모조리 죽인다” “전라도 사람 씨를 말리러 왔다”

21:00시, 광주 시내의 시위가 갑자기 확산되자 정웅 31사단장은 21시경에 7공수여단 33 및 35대대장을 소집하여 작전회의를 열었다. 정웅 31사단장은 작전회의에서 광주 시내의 36개 중요거점에 특전사 병력을 배치하여 시가지를 점령하고 시위군중이 도심지에 집결하지 못하도록 길목에서 원천 봉쇄할 것이며 과격시위자는 전원 체포하라는 작전지침을 내리고, 33대대에는 17개 거점을, 35대대에는 19개 거점을 할당했다. 23:20분경, 7공수여단  33대대와 35대대는 정웅 31사단장의 출동 명령에 따라 광주 시내에 출동하여 거점을 경비하면서 시위군중의 도심지 집결을 강력하게 저지함에 따라 곳곳에서 충돌하는 사태들이 이어졌다. 5천여 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도청과 광주역 앞에 집결하여 시위를 벌이자 정웅 31사단장은 23:40분경에 또 다시 긴급작전회의를 소집하여 7공수여단 35대대는 도청 경비에, 33대대는 광주역 경비에 임하도록 명령하고 극렬시위자는 전원 체포하라고 거듭 지시했다. 36개 거점을 방어하기는커녕 도청과 광주역의 상항이 다급해진 것이다. 광주역과 도청에 출동한 33대대와 35대대가 철야시위에 가담한 시위자 273명을 연행하여 31사단 헌병대에 인계했다. 김경철(28세)이 찰과상으로 통합병원에 후송되었지만 다음 날 사망했고, 이종남(27) 등 시민 수십 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계엄군 15명과 경찰관 310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날 동원됐던  경찰병력은 95/1,830명이었다.

당시 7여단은 전북 금마에 위치해 있었고, 여단장은 신우식 장군, 33대대장은 권성만 중령으로 전주 출신, 35대대장은 김일옥 중령으로 대구 출신, 그리고 35대대 제3중대장 박병수 대위는 김제출신이었다. 박대위는 조선대로 가는 것을 소풍을 가는 것쯤으로 생각하여 아무런 진압도구를 챙기지 못했고, 여단에는 전라도 출신들이 매우 많다고 증언했다. 5월 22일부터 전교사 사령관을 맡았던 소준열 장군은 민화협(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에서 7공수 여단의 40%가 전라도 출신이라고 증언했다. 서울과 8개도가 모인 부대에서 전라도 사람들이 40%를 차지했다는 것은 전라도 사람들이 7공수여단의 문화를 지배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유언비어는 경상도 군인만 골라서 왔다고 했다.  다음은 김제출신 박병수 대위의 증언이다.  

여단본부에서 출발하여 대학에 진주한다는 말을 듣고 바둑판과 배구공을 가지고 갔다. 대학에 진주한다기에 놀라가는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우리 부대는 주둔지가 전북이라 전라도 출신들이 많이 있었다. 실탄은 개인 별로 가져가지 않았고, 소나무로 만든 진압봉 하나씩 들고 갔다. 진압봉과 사과탄이 무기의 전부였고, 방석모, 방패, 최루탄 발사기 같은 것도 없었다. 시위 현장에 나가 있던 우리는 식사 보급차량이 접근하지 못하는 관계로 비상 특전 식량만 먹었고, 더운밥을 먹은 기억이 없다. 잠을 거의 못 잔데다가 배가 고파 앉기만 하면 잠이 왔다.  

아래는 11공수 61대대장 안부웅 중령의 증언이다.

5월18일 00시부로 동국대로 출동하여, 거기에서 주둔하던 중 여단본부 전체가 이동해서 12시경부터 천막을 치고 있던 차에 15:00시경에 여단장에게서 광주로 이동하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광주출동 당시 실탄은 개인에게 지급되지 않았고, 후속부대가 가져오도록 조치했습니다. 5월 18일 오후 늦게 송정리 비행장에 도착, 버스에 분승한 뒤 조선대로 이동했습니다. 조선대에 들어가니 7여단 병력이 숙영준비를 했습니다. 도착 뒤 병사들에게 밥을 먹이려 했으나 급히 출동하느라 취사도구를 가져오지 않아 7여단에 가서 우리 대대 취사를 할 수 없는지 알아보니 7여단도 자기 병력들 밥만 할 정도의 취사도구밖에 없었습니다. 31사단 최종회 중령이 겨우 취사도구를 구해주어 병사들 밥을 먹였는데, 그 때가 저녁 11시경이었습니다. 식사 후 병사들을 취침시켰고, 저도 약간 잠을 잤는데 5월 19일 새벽 2-3시 사이 여단 본대가 열차로 도착하여 조선대에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우리 대대가 쳐놓은 천막을 할당해 주었습니다.

          5.18일에는 31사단장 정웅이 직접 지휘했다.

이날 광주사람 정웅 사단장은 21:00시와 23:40분 2차에 걸쳐 작전회의를 열고 7공수 2개 대대에 36개 거점을 할당했다. 시위대를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저인망식 작전명령을 내린 것이다. 2개 대대라 해야 병력은 장교와 본부를 합쳐 겨우 600명 정도에 그친다. 이들에게 36개 거점을 배당했다는 것은 1개 거점 당 15명 정도의 병사들을 배치하라는 것이었다. 이 15명에게 수천 단위로 모이는 시민군을 상대하여 주동자 전원을 체포하라고 명령한 것은 참으로 무모하고 무식한 지시가 아닐 수 없다. 이는 공수부대원들이 당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지시였으며, 궁지에 몰린 공수부대원들로 하여금 이성을 잃도록 강요했던 참으로 무모한 명령이었다. 바로 이 정웅의 명령이 초기의 강경대응을 강요했던 것이다.        
                
일반부대가 아닌 특전부대를 광주에 출동시킨 것은 의도된 범죄행위라는 검사-판사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에서 판-검사들은 광주에 특전사를 출동시킨 것이 소요사태를 강력하게 진압하기 위해 사전에 계획한 것이라고 몰아갔다.“전국비상계엄이 선포되고 김대중이 체포되면 광주지역에서 시위가 발생하리라는 것을 우려한 신군부세력이 소요사태를 강력하게 진압할 목적으로 특수부대인 공수부대를 광주에 출동시켰다”는 것이다. 병사의 신분으로라도 군에 갔다 온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법관들의 이 주장이 어처구니없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계엄령 제10호에 의거 공수여단들은 주로 대학가에 배치됐으며, 서울에 있는 대학들에는 총 16개 대개가 배치됐고, 광주에는 불과 2개 대개(조선대, 전남대), 전북대에 1개 대대, 충남대에 1개 대대가 배치된 것이다. 이것이 당시 전국 대학들에 배치됐던 공수부대의 전 자산이었다. 고소인들이 이런 주장을 해도 혀를 찰 일인데 하물며 판검사들이 이런 억지를 부린다는 것, 그것도 한 때 대한민국 역사를 이끌었던 전직 2명의 대통령과 수많은 4성장군 출신들을 상대로 이런 억지를 뒤집어씌운다는 것은 판검사들의 표현대로 국민을 외포(공포)케 하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어마어마한 신분들에 대해서도 이러하다면 서민들의 인권은 얼마나 많이 그리고 얼마나 비참하게 유린될 수 있는가를 짐작케 하는 대목인 것이다.        

당시 우리나라는 한미방위조약에 의하여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한미연합사에 맡겨 놓고 있었으며, 평시에 한미연합사의 작전통제를 받지 않고 한국 정부가 독자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부대는 특전사 4개 공수여단 뿐이었다. 따라서 박정희 대통령 시절부터 오늘 날에 이르기 까지 국내에 소요사태가 발생하여 군을 출동시킬 필요가 있을 때에는 1차적으로 특전부대 병력을 동원하여 사태 진압에 임하고 특전부대만으로 사태수습이 불가능한 극단의 상황이 오면 한미연합사와 협의하여 그 작전통제 하에 있는 일반부대를 추가 동원하도록 되어 있었다. 1979년 10월 부마사태(3공수)나 1980년 4월에 있었던 사북사태(11공수) 시에도 특전부대가 사태 진압을 위하여 출동했다. 광주에 특전부대가 출동한 것도 이와 똑같은 것이지 특별히 광주가 미워서 유독 광주에만 공수부대를 보낸 것은 아니었다. 법관들의 이러한 주장은 경상도 군인이 전라도 사람들을 무차별로 사살하기 위해 공수부대를 보냈다는 터무니없는 유언비어와 유사한 주장인 것으로 해석된다.  

          군대 모르는 검사-판사들이 지휘체제를 마음대로 해석

진종채 2군사령관은 1980년 5월 17일 계엄사령부에서 육본작전명령 제18-80호로 전 계엄군에 대하여 관할구역 내의 중요 대학 및 국가시설 보안목표에 소요진압부대 및 경호경비병력을 투입하라는 지시가 내려오자 충정작전계획에 따른 계엄군 배치계획에 의거하여 5월 17일19시경, 다음과 같은 조치를 취했다.

특전사 7공수여단은 5월 18일 02시까지 31대대를 전북대에, 32대대를 충남대에, 33대대를 전남대에, 35대대를 조선대에 각 출동하여 현지 지휘관의 작전통제를 받아 주요 국가시설 경계업무에 임하라.

바로 이 명령에 따라 광주지역 2개 대학에 33대대 및 35대대가 간 것이다. 당시 광주에는 전교사 직할부대 52명, 31사단 병력 385명, 전교사 헌병 100명 등 가용할 수 있는 인원이 불과 537명에 불과하여 이 병력으로는 광주에서 일어나고 있는 시위로부터 국가주요시설 및 보안목표를 보호할 수 없었다. 그래서 진종채 사령관이 전북에 1개 대대, 충남에 1개 대대에 비해 광주에 2개 대대를 보낸 것은 극히 당연한 부대배치라 할 수 있다. 신우식 7공수여단장은 2군 사령관의 출동명령에 따라 33대대 병력 330명( 45/285명)을 5월 18일 02시경에 전남대에 출동시켰고, 35대대 병력 313명(38/ 275명)은 같은 날 02시 30분경에 조선대에 출동시켰으며 7공수여단 33대대와 35대대는 광주 현지 지휘관인 정웅 31사단장의 작전지휘에 들어갔다.("7공수여단 광주지역소요사태 진압작전" 31-32면) 이는 신군부와는 아무 상관없이 계엄사 내규에 의해 자동적으로 취해진 조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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