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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계엄사의 대응


                                                             11. 계엄사의 대응

계엄사도 빠르게 움직였다. 1980년 4월초, 치안본부는 계엄위원회에 무정부 상태에 대한 통계를 보고했다. 1980년 1월부터 3월까지 발생한 범죄에 대한 통계였다. 살인이 64.3% 급증했고, 강도가 113.9%, 폭력이 20.1%, 절도가 21.4%, 밀수가 122.6% 급증했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서정화 내무장관은 “강력범들에 대해서는 사회복귀가 불가능하도록 강제노동이나 강제수용 등의 특별관리가 필요하니, 계엄당국이 이를 뒷받침해주었으면 좋겠다”는 건의를 했다. 이는 삼청교육대의 필요성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학세력과 노동세력의 폭력시위가 연일 끝 간 데 없이 치닫고 있어 종교계, 경제계, 언론계 등에서 파국적 난국을 하루 빨리 수습해달라는 요구가 빗발쳤다. 난동꾼들이 설쳐대는 무정부 상태였던 것이다.  

4월 27일,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최규하 대통령으로부터 학원소요사태에 강력하게 대응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에 이희성은 4월 30일, 전국 계엄지휘관회의를 열어 학원-노조의 난동이 법치주의의 한계를 넘은 것이므로 단호하게 대처할 것을 지시했다. 5분 대기조 편성, 진압훈련 등 소요사태 대비훈련도 강화하라고 지시했다. 5월 3일, 특전사 9여단이 수도군단에 배속됐다. 5월 7일, 특전사 13공수여단이 서울 거여동으로 이동했다. 5월 8일, 11공수여단(강원도 오음리)이 김포에 이동 배치됐다(육본작명 제12-80호, 13-80호). 같은 날, 계엄사령관은 각 광역별 계엄분소에 지역기관장 및 교육감, 대학총장 등으로 구성된 ‘학원사태수습대책협의회’를 운영할 것을 지시했다. 5월 13일, 계엄사령관은 김재명 작전교육참모부장을 ‘소요사태대책본부장’으로 임명했다. 한편 국방부 장관은 전군에 대간첩태세 강화지시를 내렸고, 5월 15일에는 간첩침투가 예상되는 152개 취약도서에 일제히 수색작전을 실시했다. 5월 14일, 내무장관이 신현확 총리에게 당시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대규모 학원소요에 대해서는 경찰병력으로는 진압이 불가하니 계엄군의 출동이 요청된다고 보고함과 아울러 이희성 계엄사령관에게도 계엄군의 출동을 요청했다. 이에 계엄사령관은 정호용 특전사령관에게 특전사 6개 여단을 소요사태 진압에 투입할 수 있도록 준비하라고 지시했다.(작전 제0-203호)

1980년 5월 15일, 주영복 국방장관과 김종환 내무부장관이 함께 헬기를 타고 서울 시내 시위상황을 직접 점검했다. 서울역 시위가 대단해 보였을 것이다. 헬기를 타고 시위현장을 직접 둘러본 국방장관은 즉각 20사단 3개 연대를 잠실종합운동장과 효창운동장에 출동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서울역 10만 시위대를 지휘했던 심재철이 왜 갑자기 청와대 진입을 포기하고 회군을 했느냐에 대해 민주화세력들은 참으로 아쉬워하면서 이를 미스터리로 여기고 있다. 아마도 계엄군에 내린 출동지시가 즉각적으로 새어나갔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5월 16일 밤 10:30분, 최규하 대통령이 중동으로부터 급거 귀국했다. 당시 최규하 대통령은 오일쇼크로 인한 심각한 유류부족 현상이 발생하자 이를 타개하기 위해 5월 10일 중동순방길에 올랐지만, 5월 14일부터 소요사태가 심각해지자 에너지 외교를 중간에 포기하고 급거 귀국한 것이다. 신현확 총리를 위시하여, 김종환 내무, 백상기 법무, 주영복 법무, 이희성, 전두환 중정부장서리 등으로부터 상황을 보고받고 나서 대통령은 숙연한 말을 했다, “외국에 나가보니 국내가 시끄러워 창피한 마음이 들었다. 이 나라를 후손들에게 제대로 물려줄 수 있을지 걱정이 된다.” 5월 18일, 수경사 헌병단, 30단, 33단 병력 670명과 전차 8대, 장갑차 22대가 청와대 특정구역을 경계하기 시작했고, 1,2,3군 지역 내에 있는 71개 방송국, 중계소들에 1,067명의 계엄군을 출동시켜 경계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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