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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재야 세력과 최규하 정부와의 전쟁


                                              3. 재야 세력과 최규하 정부와의 전쟁

1979년 12월 8일, 최규하 대통령은 긴급조치 9호를 해제했다. 긴급조치 위반자 68명에 대해 형집행을 면제하고, 김대중의 가택연금도 해제했다. 당시 김대중은 1976년 긴급조치9호를 위반한 죄로 진주교도소에 수감돼 있다가 1978년 12월, 가택연금으로 전환되어 있던 차였다. 이어서 최규하 대통령은 1979년 12월 21일의 취임식에서 이렇게 천명했다.

사회 안정과 공공질서를 유지하는 가운데 착실한 정치발전을 이루는 데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 . . 앞으로 1년 정도면 국민의 대다수가 찬동할 수 있는 내용이 담긴 헌법을 마련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며, 이에 수반되는 필요한 제반조치를 착실하게 취해서 가급적 빠른 시일 내에 공명정대한 선거를 실시하겠습니다.

이어서 정부는 1980년 1월 21일에 법제처에 헌법연구반을 설치했다. 동년 2월 29일, 최규하 대통령은 김대중 등 시국사범 687명(학생 373, 정치인 22, 종교인 42, 교수 24, 언론인 9, 기타 217)을 복권하는 등 과감한 조치를 취했고, 이어서 1980년 3월 14일, 대통령 직속 자문기관으로 ‘헌법개정심의위원회’를 발족시켜 본격적인 헌법개정 작업에 들어갔다. 대통령으로서는 최대한의 노력을 경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반면 1979년 11월 26일, 국회는 여야 만장일치로 국회에 개헌특위(헌법개정심의특별위원회)를 설치하여 국회주도의 헌법 개정을 추진하려 했다. 최규하 정부는 헌법개정 작업이 정부의 몫이라 한 반면, 정치인들은 헌법 개정을 국회가 주도해야 한다고 맞선 것이다. 이에 1980년 1월 18일, 최규하 대통령은 기자회견을 통해 개헌안의 발의 책임이 대통령에 있다는 것을 들어 정부가 개헌작업을 주도할 것이며 80년 3월 중순까지 대통령 직속으로 ‘헌법개정심의위원회’를 설치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신민, 공화 양당은 이에 불복하면서 80년 2월 9일, 대통령 중심제, 대통령 직선제, 임기 4년에 1차 중임을 골격으로 하는 헌법시안을 확정하고 이를 국회개헌특위에 제출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러한 정치권의 작태를 지켜본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무분별한 정치과열 현상을 용납할 수 없다며 정치권에 일침을 가했다. 이에 야당과 재야세력은 정부의 헌법개정기구 자체를 즉각 폐지하라며 계엄사령관에 맞섰다. 1980년 3월 15일, 김영삼이 이끄는 신민당은 ‘민주화촉진대회’를 열고, 정부의 헌법개정심의기구를 즉시 해체하고, 신현확 내각의 즉각 사퇴를 촉구했다. 응하지 않으면 중대결단을 내리겠다고 협박까지 했다. 같은 날, 재야세력의 대표인 김대중은 ‘민주화투쟁’을 선포하고 나섰다. 이후 야당인 신민당과 재야세력은 유언비어를 퍼트리기 시작했다. “정부가 유신세력을 주축으로 신당을 구상하고 있다” 유언비어에 의한 정치공작이 동원되기 시작한 것이다. 에에 대해 신현확 총리는 1980년3월28일, 헌법개정심의위원회 제1차 회의에서 인사말을 이렇게 했다.

정부는 약속한 대로 연내 헌법 개정을 확정하고, 선거법, 정당법 등 수반입법을 마무리한 후에 새 정부에 정권을 이양하겠으며, 이 약속은 반드시 지켜질 것입니다” 이어서 신총리는 1980년 4월 24일, 기자회견을 통해 이렇게 말했다. “이미 약속한 정치일정에 대한 약속을 지킬 것이며, 최규하 대통령과 본인은 다음 선거에 출마하지 않을 것입니다. 시중에 나도는 범여권 신당설은 사실무근입니다.  

1980년 4월 29일, 김대중이 주도하는 ‘국민연합’은 ‘민주화촉진국민운동’을 전개하겠다는 선포와 함께 불법적인 장외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이에 당황한 신총리는 1980년 5월 3일, 김영삼 신민당 총재와 회동을 했지만 양측의 주장은 팽팽히 맞서기만 했다. 신현확 총리는 ‘선 안정’을, 김영삼은 ‘선 민주화’를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서 민주화라는 것은 최규하 과도정부를 즉시 해체하라는 것이었다. 1980년 5월 6일, 국무총리에 이어 최규하 대통령 역시 국무회의 자리에서 “이미 발표한 정치일정을 준수할 것”이라고 확약했다. 198년 5월 12일, 신현확 총리는 신민당 대변인 박권흠을 초청하여 국내외 정세를 설명하고 신민당이 정국안정에 협조해주기를 바란다는 뜻을 전했다. 하지만 정치권의 급진주의적인 사고방식이 이를 수용할 리 없었다. 사태를 더욱 악화시킨 것은 공화당 김종필의 불투명한 태도였다. 김종필은 “공화당은 여당이 아니라 다만 야당에 불과하다. 공화당은 정부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며 재야의 편을 들었다. 이로써 정치권에는 여당이 없고, 과도정부는 일방적으로 밀리기만 하면서 정국은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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