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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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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아이덴티티

내일이라도 비행기를 타고 해외로 나가면 당정 부딪치는 것이 한국인의 아이덴티티(identity)다. 그 아이덴티티에 의해 외국인이 한국인을 대해주기 때문이다. 한국인이 사기꾼이라고 소문나 있으면 외국인은 한국인을 잘 상대해주지 않을 것이다.

일본인에게는 [품질, 서비스, 친절, 근면, 신용, 정직]이라는 훌륭한 아이덴티티가 붙어있다. 일본인들은 세계에서 가장 약속을 잘 지키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인식이 확산돼 있다.

미국에서 변호사를 찾을 때에도 많은 사람들이 미국 변호사보다는 일본 이름을 가진 변호사를 찾는다. 국제 경영교과서에서 가장 모범적인 기업은 대부분 일본 기업들이었다.

미국인으로부터 상품을 샀을 때 문제가 발생해 연락을 하면 미국인들은 '행정절차 때문에 6개월을 기다려야 한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3일내로 가겠다'고 말해놓고서도 그 다음날로 날아온다'. 이런 것들이 일본인에 대한 세계인의 이미지이다.

한때 한국인에게도 아이덴티티가 있었다. 한강의 기적을 이룩한 한국인, 부지런한 한국인, 그리고 새마을운동 들이었다.

1970년대에 미국에서 경영학을 공부했다. 한국의 경제성장 모델이 온갖 찬사와 함께 등장됐다. 구호품만 받아쓰면서 자아를 잃었던 한국인에게 비로소 그나마의 자랑스런 아이덴티티가 생겼던 것이다.

국내에 있을 때는 몰랐다. 그러나 외국에 나가보니 이 몇 개의 아이덴티티가 그렇듯 고마울 수 없었다. 그 때는 내가 한국인이라고 서슴없이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러한 이미지들이 바닷가에 쓰여졌던 글씨처럼 흔적 없이 지워져 버렸다. 그후 세계인들에게 남겨진 한국인의 모습은 거의가 다 부끄러운 것들뿐이다.

시끄러운 한국인, 돈자랑-자기자랑하는 한국인, 매너없는 한국인, 클레임 안 받아주는 한국인, 불친절한 한국인, 보신관광 한국인, 성수대교 한국인, 부패한 공무원들과 같은 것들이다.

돈 있는 한국인이 일본 고급 호텔에 묵고 있으면서 비싼 그림 하나를 배달시켰다. 잘 포장된 그림이 호텔로 배달됐다. 그 포장지가 무엇에 눌려 약간 들어가 있었지만 그림에는 영향이 없었다.

한국인 같으면 그냥 돌아가면 될 일을 가지고 그 배달사원은 자꾸만 사과를 했다. 자기가 철저하지 못해서 발생된 일이니 용서만 해준다면 금전적인 보상은 얼마던지 해드리겠다고 했다.

바보같이 보일 만큼 순진한 이 일본인에게 한국인은 웬 떡이냐 싶어 그림 값에 버금가는 엄청난 돈을 물렸다. 그 일본인은 고맙다고 몇 번씩 절을 하며 돌아갔다. 영악한 한국인과 어수룩한 일본인의 모습이었다. 그 영악한 것만큼 한국인들이 잘살고 그 어수룩한 것만큼 일본인들이 못사는가?

한국인은 세계인들에게 나쁜 이미지를 주었지만 일본인은 이렇게 해서 세계인들에게 가장 훌륭한 이미지를 심었다. 그 공동의 자산 밑에서 일본인들이 번성하고 있는 것이다.

철저하지 못한 대가로 돈을 물어준 일본인은 다시는 그러한 잘못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쏟는다. 돈을 쉽게 버는 것을 경험한 한국인에게는 도덕적 해이가 싹텄다.

한국의 고위 공무원들이 외국에 나가면 대화를 할 줄 몰라 주로 자기자랑을 한다. 자기의 파워가 엄청나다는 것이다. 과장해 놓았기 때문에 외국인이 그에게 무엇을 부탁하면 체면상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자기자랑 대가로 그들은 국익을 내준 것이다. 대통령 역시 해외에 나가 '한국병을 내가 고쳤다'던가 '한국에 자본과 기술이 많다'고 자랑했다. 세계적인 인물은 자기의 국내업적이나 자산을 해외에 나가서 자랑하지 않는다.

한국인의 아이덴티티 중의 하나가 '자랑하는 한국인'이었다. 우리는 '자랑하지 않는 한국인'으로 발전해야 한다. 바로 이러한 세계적 센스를 기르는 일도 세계화 노력의 주요 내용인 것이다.

군을 움직이는 국방부의 아이덴티티는 무엇인가. 국내사회에서는 무대포, 무상식, 경직성, 무매너다. 나는 가끔 군의 잘못을 지적하는 글을 쓴다. 만일 군이 내 생각을 수용하려고 노력만 해주었다면 나는 밖에다 글을 쓰기 전에 군에 은밀한 제언들을 해왔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흔한 국방자문교수 한번 못했다. 나는 국방연구원에 7년간 있으면서 이러한 노력을 했다. 노력을 하면 할수록 나는 야전장교들로부터는 박수를 받았지만 국방부 참모들로부터는 트러블메이커 대접을 받았다.

자기들의 소관분야를 침해당했다는 생각 때문이기도 하지만 국방부는 고인 물 같이 변화를 싫어하는 집단이기 때문이다. 변화를 싫어하면 점점 더 망가진다.

국방부는 율곡사업을 집행하는 기구다. 수많은 국내외 업체를 상대로 한다. 이 과정에서 외국업체들에게 비친 한국 국방부의 아이덴티티 역시 국내인들에게 비쳐진 것과 같다.

그들은 골치 아픈 한국군 바이어를 다루는 방법을 잘 알고 있다. 두뇌회전과 정보조작 능력은 업체들이 앞서 있다. 경직된 군이 외국기업에게 바가지를 듬뿍 쓰는 것이다. 이러한 아이덴티티 때문에 손해보는 사람들은 세금을 내는 국민들뿐이다.

한국군은 아이덴티티를 바꾸는 개혁작업부터 주도해야 한다. 이 간단명료한 주제는 다루지 않고 군은 언제나 복잡하게만 말한다.

제2차 세계대전시 연합군 병사에게 비쳐진 롬멜군의 이미지는 신출귀몰하는 뿔 달린 병사들이었다. 반면 당시의 연합군 병사는 심리적으로 위축돼 버린 얼간이들이었다. 그들은 잘해야 지정해준 방향으로 총만 솔 수 있었다.

몽고메리 장군은 이렇게 형편없는 병사를 가지고도 롬멜군을 무찔렀다. 전략개념이 간단명료했기 때문이다. 그는 전쟁터를 일일이 돌아다니며 병사를 어떻게 배치해야 하는지를 스스로 연구했다.

그리고 병사들에게 참호의 위치를 정해주고 사격명령을 내리면 무조건 정해준 방향으로만 사격하도록 자세히 일러주었다. 혼돈이 있을 수 없는 간단명료한 명령이었다.

아무리 병사가 훌륭해도 개념이 복잡한 전투계획은 100% 실패한다. 간단명료한 작전계획만이 서옹을 기약할 수 있다. 세계적인 석학에게 무엇을 배우면 옛날 이야기 듣는 것처럼 이해가 빠르다. 하지만 내용도 모르면서 가르치는 교수를 만나면 머리만 흔들어 놓는다.

한국에는 몽고메리 장군처럼 간단명료한 전략을 내놓는 사람도 없고, 알기 쉽게 비전을 설교하는 세계적인 석학도 없어 보인다.

2001. 3.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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