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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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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 사업 소요 제기 시스템을 바꾸자(44)

군의 기능은 군령과 군정으로 분류된다. 율곡 사업 요소제기 기능은 합동 참모 본부를 정점으로 하는 군령 기구 소관이다. 군령 기구는 군사 전략을 세우고 그 군사 전략을 수행하기 위해 무슨 무기 체계가 필요한지를 정의해 내야 한다. 그들이 무슨 무기를 필요로 하는지에 대한 쇼핑 리스트를 작성해 내는 절차가 소요 제기 절차다. 소요 제기는 합참의장이 국방 장관에게 ‘합돈 전략 목표 계획서’(JSOP: Joint Strategic Objective Progrem)라는 문서를 통해 제출된다.

율곡 사업에서 ‘사용자’라는 말은 커다란 의미를 갖는다. 장비의 사용자는 군령 기구에 속해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사용자’로서의 주인 의식을 가지고 그들이 필요로 하는 무기가 무엇인지를 판단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권한은 분석력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 분석 능력이란 ‘어떻게 싸울 것인가’(How to fight)에 대한 전략/전술 개념을 분석해 내고 어떤 기능과 성능을 갖는 무기가 있어야 그 개념을 수행할 수 있는지를 정의해 내는 분석력이다.
그 결과는 각 무기에 대한 ‘군 요구 성능’(ROC: Required Operational Capability)으로 표현된다. 미국인들은 이를 ‘선 개념 후 소요 시스템’(CBRS: Concept Based Requirement System)이라고 한다. 미국 육군의 경우 이러한 분석 능력은 ‘훈련 교리 사령부’(TRADOC: Training And Doctrine Command)가 지니고 있다. 5만명의 과학자, 기술자 그리고 시스템 분석자들이 ‘훈련 교육 사령부’에 소속되어 있다.

이들은 1백여 개의 사설 연구소를 동원하여 개념과 교리를 연구해 낸다. 연간 100~130억 달러가 연구비로 지출된다. 교리 연구를 위해 무기 하나하나에 대한 성능도 시험 평가하지만 보병 병사와 탱크 그리고 전투기까지 동원된 합동컴비전을 수행하기 위한 교리를 이끌어 낸다. 이를 위해 서울시의 두 배만한 크기의 시험소들이 운영되고 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이들은 현존 장비에 대해 시험평가 업무를 수행하지만 장차 10~20년 뒤의 무기 성능에 대해서도 개념을 도출해 낸다. 한국 군의 경우 유군에만 ‘교육사’가 있다. 이는 미국의 ‘훈련 교리 사령부’를 본떠서 만들어 진 것이다. 그래서 교육사는 ‘군요구성능’(ROC)을 만들어 내고 새로운 장비가 획득되면 이에 대한 시험 평가 기능을 수행한다. 그러나 교육사의 형태와 임무는 미국 것을 본뜨기만 했지 그들에겐 이러한 임무를 수행할 능력이 없다. 인력 때문이다. 조직의 규모와 틀을 먼저 짜놓고 인력은 전후방 부대에서 충원하는 식으로 형성된 부대였다. 하나의 후방 부대에 불과한 이들이 어떻게 전문 분야를 개척할 수 있겠는가.

미국군의 소요 제기와 한국군의 소요 제기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미국군의 소요 제기는 ‘훈련 교리 사령부’의 분석인들이 고도의 창의력을 발휘하여 만들어 낸 하나의 작품이다. 무기 종류, 수량 그리고 군 요구 성능은 시스템 분석인들이 창조해 낸 것이다. 미 육군의 경우 ‘물자 사령부’(AMC: Army Material Command)는 14만 명으로 구성돼 있다.

이 기구는 방대한 사업단과 실험 사령부 그리고 성능 평가 기관 (Proving Ground)으로 구성돼 있다. 실험 사령부는 우리나라의 ‘국방 과학 연구소’(ADD)와 같이 과학 기술자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이들은 ‘훈련 교리 사령부’의 ‘작전 성능’을 ‘기술 성능’으로 전환시켜 방산 업체의 연구 개발팀에게 연결시켜 주는 일을 하고 있다. 이들은 군과 업체를 잇는 통역관인 셈이다.

물자 사령부, 실험 사령부와 방산 업체 간에 기술 성능에 대한 계약이 이루어지면 각 장비별로 사업단이 구성되어 이를 관리한다. M1 전차의 사업단 규모는 한때 150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한국군의 경우 아이러니컬한 현상이 마치 정석인 것처럼 이어져 왔다. 미 육군 물자 사령부 내의 실험사령부가 수행하고 있는 기술 통역관 노릇을 해야 할 ‘국방 과학 연구소’(ADD)가 국산화 장비에 대한 사업단 노릇을 하고 있는 현상이다.

미국 군은 두 개의 쌍두 마차에 의해 앞으로 전진하고 있다. 하나는 ‘훈련 교리 사령부’이며 또 다른 하나는 ‘물자사령부’이다. 전자는 용병 개념을 개발해 내고 후자는 장비를 개발해 낸다. 이들이 얼마만큼의 고급 두뇌를 활용하는가에 따라 그들이 ‘과학’을 하고 있느냐 또는 단지 ‘행정’을 하고 있느냐에 대한 색깔이 구별된다. 미국 군은 ‘과학’을 하고 있지만 한국군은 ‘행정’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은 것이다.

한국군의 소요 제기는 오퍼상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소요제기 절차는 기나긴 행정의 연속이다. 소요 제기의 출발점은 각군 본부 과 단위에 있는 행정 장교다. 더러는 소령급이고 더러는 준위급이다. 이들은 평상시에 과 행정 업무를 수행하다가 소요 제기 시점이 도래하면 소요 제기 업무를 겸한다. 이들은 군사 기술에 대한 특별한 교육을 받은 적도 없으며 기술 잡지를 볼 수 있는 시간적 여유도 없다.

이들에게 오퍼상의 존재는 절대적이다. 만일 오퍼상이 이들에게 새로운 장비에 대한 안내를 제공해 주지 않으면 그들은 소요 제기 공문에 기입해 넣을 품목을 단 하나라고 찾아 낼 수 없다. 오퍼상이 안내 책자를 갖다 주면 가장 먼저 요구하는 사항이 책자를 ‘번역’해 달라는 것이다.

물리적 파괴력을 갖는 장비에 대해서는 비교적 단시간 내에 소화한다. 그러나 전자 장비와 같은 기술 장비에 대해서는 그 개념을 잘 소화하지 못한다. 이해력이 빠른 장교가 소요 제기 장교일 때에는 기술 장비가 소요 문서에 오를 수 있으나 이해력이 부족한 장교일 경우에 기술 장비는 군의 관심을 끌 수 있는 기회마저 갖지 못한다.

한국군은 오래 전부터 과학군을 표방해 왔다. 그러나 첨단 과학 장비는 그렇게 해서 소요에 반영될 수 없었다. 군인들만 첨단 전자 장비에 대해 어두운 것이 아니다. 군인들보다 다소 앞서 가긴 했어도 오퍼상들 역시 그렇다. 그 어느 오퍼상도 세계 무기 발전 추세와 군사력 발전 추세를 조감하고 한국군이 무엇을 필요로 할 것인가를 찾아내 주지는 못했다. 오히려 수많은 업체들이 ‘아이템’만 연결되면 이를 로비라는 수단에 의해 군에 밀어 넣었다.

각군이 합동 참모 본부네 제출하는 소요 제기 문서 속에는 오퍼상들이 이것저것 가져다 준 장비들이 들어 있을 뿐이다. 물론 전차나 차세대 전투기와 같이 덩치 큰 장비는 예외다. 군이 오퍼상들에게 어떤 장비들을 찾아오라고 요구한 적은 거의 없다. 이는 군사력이 목표 지향적으로 건설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느 한 장비가 말단 실무자의 눈에 띄었을 경우라도 그는 이를 추진하기를 주저한다. 혹시 무기상과 연루되어 있다는 오해를 받을까 해서다. 오퍼상이 실무자로부터 얻어낼 수 있는 최대한의 성과는 ‘장비는 좋지만 제가 총대는 멜 수 없습니다'라는 대답이다. 높은 사람으로부터 지시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반대로 높은 사람으로부터 지시가 있다해도 실무자를 설득하지 못한 장비는 시간만 끌다가 사라지게 된다. 실무자가 사명감을 가지고 어느 장비에 대해 적극적으로 나서면 그는 한두 번쯤은 주위로부터 ‘당신 업체 편을 드는 거냐’라는 비인격적인 말을 듣게 된다. 마음이 상한 실무자는 십중팔구 그 사업에 대해 소극적이게 마련이다.

모든 사람들이 이러한 자세를 취한다면 정말 훌륭한 장비는 제외될 것이며 로비력 강한 업체가 불러일으키는 선풍은 여론화되어 승승장구 소요 문서에 올라가게 된다. 어떤 오퍼상은 아래로부터 위에 이르기까지 많은 장교들을 평소에 ‘관리’한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현안에 대해 남다른 분석을 하게 된다. 그 분석의 결과는 논리이며 논리의 결과는 특정 대안에 대한 선호도로 표현된다. 따라서 중립을 표방하는 사람들은 겉으로는 그럴듯해도 논리가 없는 사람들이다.

‘적이 없는 사람은 친구도 없는 사람’이듯이 분석과 논리로 뒷받침되지 않은 정책 결정자들은 소신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 소신이 자료와 논리로 뒷받침될 때에 그는 어느 특정 장비를 정정당당하게 선호해야 한다.

군 병원 의무 장비에 대한 소요 제기는 해학적이기까지 하다. 시간에 쪼들리고 인사 제도에 불만과 짜증이 많은 군의관들에게 1년에 한 번씩 소요를 제기하라는 문서가 날아온다. 그들은 그런 행정을 선천적으로 싫어했다. 어쩌다 오퍼상으로부터 날아든 장비가 있으면 귀찮은 김에 그것을 적어 보내라고 행정병에게 지시해 버린다.

그가 지시 내린 장비가 어느 날 도착하더라도 그가 예편하고 나간 몇 년 뒤의 일이기 때문에 그에겐 책임 의식도 없었다. 이렇게 해서 도입된 의무 장비에는 실로 여러 가지 낭비 현상이 내재되어 있었다. 전방 지역 의무실 장비 현황을 조사해 보면 구입 이후 한 번도 사용되지 못하고 창고에서 일생을 보낸 장비가 너무나 많았다. 책임 소재를 따지려 해도 아무도 책임질 사람이 없었다. 두 사람 이상에게 공동 책임이 있다는 말은 아무에게도 책임이 없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장비를 제작하는 데에는 시스템 개념이 있으나 이를 골라 쓰는 행정에는 전혀 시스템 개념이 없었다.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이러한 삼국지 시스템에 개혁을 가하지 못하는 정책적 지위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다. 소요 제기 시스템의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가 여건은 고려하지 않고 겉으로만 미국 흉내를 내고 있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미국의 경우는 ‘사용자’가 장비의 ‘성능 요건’을 창조해 낼 수 있었다. 그리고 군수 업자들은 이렇게 해서 주문된 장비를 개발하고 조달해 주었다. 이는 미국의 장비가 사용자 요구에 따라 ‘맞춤복식’으로 주문 생산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한국군은 세계시장에 나와 있는 ‘기성복식’ 제품을 골라다 쓰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절차는 미국 군을 따라 흉내내 왔다.

율곡 사업부서 가운데 가장 낙후돼 있고, 게으른 부처는 역시 국방부 군수국이다. 이들은 반 민간 사업자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방부나 합동 참모 본부에 있는 율곡 사업 장교들이 가장 대화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군수국 사람들이다. 민간 장사꾼을 대하는 기분이 든다는 것이다.

육군은 이러한 군수 참모부의 횡포를 없애고 율곡 사업관리를 신속하게 처리하기 위해 1994년에 모든 율곡 사업을 처음부터 끝까지 주재해 나가도록 튼튼한 사령탑 시스템을 설치했다. 이는 마치 삼풍 백화점 사고 처리 과정에서 드러난 각개 가진식의 처리과정을 하나의 사령탑에서 총괄 경영하는 시스템과도 같은 것이었다.

국방부와 합동 참모 본부도 이러한 육군의 율곡 관리 시스템을 도입해야 할 것이다. 하나의 사업이 행정 서류에 의해 40개 부서를 통과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원시적이다. 40개부서의 능력이 꼭 필요하다면 40개 부서 사람들을 모아 며칠에 걸친 토의를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의사 결정의 질도 향상되고 의사 결정 속도도 고속화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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