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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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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는 한국 땅, 시장은 외국 땅

우리는 지난 10여 년간 무한경쟁이라는 말에 익숙해왔다. 그러나 많은 경이들은 WTO체제에서는 국가 단위의 경기순환 사이클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직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이들은 WTO 체제 이전에 나타났던 3년 호황-2년 불황이라는 경기순환 현상이 WTO 이후인 지금도 반복될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지난 여러 해 동안 불경기가 계속됐기 때문에 앞으로는 호황이 올 것이라는 것이다. 이는 엄청난 시대 착오다.

결론적으로 앞으로의 호황은 과거에서처럼 경기순환 사이클에 의해 저절로 오는 게 아니라 경쟁력에 의해서만 올 수 있다. 정부, 기업, 농어촌이 다같이 국제경쟁력을 가질 수 있도록 경영능력을 길러야만 호황이 올 수 있는 것이다.

WTO 이전에는 고객수가 좁은 공간(finite market space)에 사는 한국인들로만 제한돼 있기 때문에 호황과 불황이 주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4천만이라는 제한된 수의 고객이 배부르면 수요가 줄어들기 시작하고, 수요가 줄어들면 공장 가동이 줄어들어 불황이 시작됐다. 2-3년이 지나 다시 고객이 배고파지면 수요가 늘어나고, 수요가 늘어나면 다시 공장 가동 율이 높아져 호황이 시작됐다. 이것이 경제학자들이 말하는 과거의 경기순환 사이클이었다.

그러나 WTO 이후의 무한공간의 시장(infinite market space)에서는 고객이 무한대로 많다. 세계의 무한대 인구 중에는 배고픈 고객은 항상 있게 마련이고 또 얼마든지 많다. 값이 비싸서 살 엄두를 내지 못 내던 소비자들은 이제 세계로부터 몰려오는 값싼 제품과 서비스를 얼마든지 살 수 있게 됐다.

고객의 입장에서 지금 가장 바라고 있는 것들 중의 하나는 핸드폰 시장에 외국 기업들이 들어오는 일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아마 우리들도 미국인들처럼 1분당 45원씩의 값싼 요금을 낼 수 있게 될 것이다.

이제는 내 시장, 네 시장이 따로 없다. 모든 시장은 국제경쟁력이 있는 기업들이 우선적으로 차지하게 된다. 그래서 국제경쟁력이 없는 기업은 살아남기 어렵다. 과거의 경기 사이클은 국제경쟁력이 없는 기업들이 정부의 보호를 받고, 담합에 의해 시장을 나눠 갖으면서 땅 짚고 헤엄치기 식으로 떼돈을 벌 수 있었을 때 형성됐던 주기적인 사이클이었다.

아주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 현대정공이 전차를 만들고 있다. 전차 시장은 한국 육군 시장으로 극히 제한돼 있다. 육군이 필요로 하는 전차가 1,000대라고 하자. 그래서 현대가 1년에 250대씩 4년간 납품했다고 하자. 탱크의 평균 수명은 25년이다. 그러면 현대정공의 경기 사이클은 4년 호황에 21년 불황으로 구성된다. 바로 여기까지가 "한국시장은 한국업체가 독 자치"했던 WTO 이전의 경기 사이클이었다.

그러나 만일 WTO 체제의 기본정신에 따라 방위산업 수주에서도 국제간의 공정한 대우(equal treatment)가 적용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한국 탱크가 훌륭해서 세계 각국이 모두 현대정공의 탱크를 사고 싶어한다고 치자. 그러면 현대정공의 탱크시장은 사실상의 무한대다. 현대정공엔 호황만 있고 불황은 없다. 반대로 한국군 마저 현대의 탱크를 외면한다면 현대정공에는 영원한 불황만 연속될 것이고 그래서 도태될 수밖에 없다.

경쟁력 있는 기업을 많이 가진 국가는 영원히 호황이고 그렇지 못한 나라는 영원히 불황일 수밖에 없다. 이것이 WTO 이후를 지배하는 호황과 불황의 원칙이다. 그래서 미국은 지난 9년간 호황을 계속하고 있고 일본은 25년간 호황을 누리고 있다. 최근 일본 경제가 어렵다거나 미국경제가 어렵다거나 하는 것은 찻잔 속의 작은 변화일 뿐, 찻잔 자체가 바다 밑으로 빠져들고 있는 한국경제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과거 국내 업체들끼리의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기업들은 이제 국제기업들과 싸워야 한다. 그들과의 경쟁에서 밀리면 한국시장에서 조차 발을 붙이지 못한다. 국제 경쟁력이 강한 기업은 세계 전체를 상대로 한 무한시장에서 상품을 팔지만 경쟁력이 약한 기업은 한국 시장에서 마저 미국, 일본 상품 등에 밀려 상품을 팔지 못한다.

과거에 우리는 일본 제품에의 의존도를 줄이기 위한다는 명분 하에 일본 제품만은 수입될 수 없다는 원칙을 세웠었다. 이를 정부는 '수입선 다변화 원칙"이라고 불렀다. 수입 선을 일본으로부터 다른 나라들로 돌리라는 원칙이었다.

미국에 장기 출장을 나갔던 사람이 일제 캠코더를 구입해 사용한 후 귀국하다가 김포공항에서 압류 당했다. "독일제를 사오셨다면 아무리 비싸더라도 무사통과 됩니다. 그러나 일제만은 안됩니다". 불과 연 전에 공항 관리자가 했던 말이었다.

그러나 이 수입선 다변화 원칙이 1999년7월부터 해제됐다. 그러자 마치 막혔던 둑이 무너지기라도 한 듯이 일본 제품들이 들어와 국내 시장을 파죽지세로 잠식하고 있다. 1999년 7월과 8월 두 달 동안 밀려들어온 48개 품목에 대한 수입액이 1년 전 연간 수입액의 184%로 증가했다. 특히 캠코더의 경우 146배나 증가해 내수 시장의 30%를 잠식해 버렸다. 카메라도 23배나 증가했다. 1년 전에 비해 수입액이 2배 이상 증가한 품목이 25개나 됐다. 특히 차량, 기계, 전자, 광학, 정밀 분야에서의 한국 상품은 일본 부품이 없으면 사실상 제조가 불가능해 진다.

일본은 한국에 완제품 수출을 점점 더 늘리기 위해, 그리고 한국의 경쟁 기업에 타격을 주기 위해 한국에 부품 공급을 기피하거나 가격을 올리고 있다. 이들 품목들 중에서 가장 애로를 겪고 있는 품목들은 차량의 자동변속기, 에어백, 수치제어 소프트웨어, 정밀부품, 캠코더용 렌즈, 휴대폰 배터리, 볼베어링 등 80-90개나 된다. 일본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이러한 핵심 부품의 종류는 앞으로 완제품에 대한 수입금지 해제 대상이 확대될수록 점점 더 증가할 수밖에 없다.

일본기업에 의한 이러한 시장 잠식 현상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심화될 것이며, 이는 곧 한국 기업들의 취약한 경쟁력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시간이 갈수록 살아남는 우리 기업 수가 점점 더 줄어들 수밖에 없으며, 일자리가 점점 더 줄어들 수밖에 없지 않은가. 무한경쟁 시대에서는 경쟁력만이 일자리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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