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ew Articles

Name


	지만원

Subject

금융개혁의 현주소

한국의 은행들은 정부에게는 금고요, 고객에게는 담보를 잡고 돈을 대출해 주는 전당포에 불과하다. IMF이후 은행들이 지각변동을 맞았고, 한국은행이 독립했고, 금융감독기관이 독립했지만 내용적으로 달라진 건 별로 없다. IMF 2년간 모두 222개의 금융기관이 증발했고, 5만여 명의 금융 종사자들이 직장을 잃었다. 9개의 은행, 18개 종금사, 6개 증권사, 5개 보험사, 2개 투신사, 41개 금고, 131개의 신용협동조합, 5개 리스사들이 문을 닫았다.

2,077개의 금융기관들 중 222개의 기관이 문을 닫고 1,855개가 살아남아 있지만, 경영능력을 보면 남아있는 기관들이라 해서 망해버린 기관들보다 나은 것은 없다. 고압적 자세, 원시적인 업무내용, 시스템 없는 경영, 담보와 꺾기 관행이 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지난 2년간 거의 모든 은행들이 적자를 기록했다. 1998년에는 13조의 적자를 보았고, 1999년에는 8조원 이상의 적자가 예상되고 있다. 지난 2년간 이들이 추가적으로 떼인 돈은 계산조차 안되고 있다.

1997년 12월3일 IMF로부터 580억 달러의 긴급 자금을 지원 받기로 한 이후 가장 먼저 정부가 착수한 것은 금융개혁이었다. 그러나 그 개혁은 부실자산을 공적자금으로 메워주고, 부실 정도가 가장 심한 금융기관들을 해체 또는 합병하는 그야말로 발등의 불만 끄는 식의 상황처리 수준에 머물러 있다. 금융기관 전체의 경영능력을 향상시키는 근본적인 문제는 조금도 시정되지 않고 오히려 관치 금융의 폐해만 더욱 증폭되고 있다.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의 자료에 의하면 중소기업들이 금융기관에서 대출 받을 때 물적 담보를 제공한 비율은 98년 36.6%에서 99년 41.2%로 늘어났다. 오랜 기간에 걸쳐 쌓아온 신용은 고려하지 않고 오직 담보만을 요구한다. 대출 액 역시 담보물 감정가의 20% 이하로 후려치는 등 중소기업에 대한 대출관행은 오히려 거꾸로 가고 있다.

1999년 과도한 담보를 요구하는 사례가 98년도에 비해 1.8배나 늘어났고, 까다로운 대출심사가 1.3배로 늘어났다. 꺾기 등 적금 가입 요구 건수는 1.5배로, 사례비를 요구한 건수는 4배로 늘어났다.

이러한 퇴보 현상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하나는 은행 간부들의 보신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간부들이 감독당국의 강화된 처벌을 빌미로 삼아 삐뚤어진 관행을 더욱 교묘하게 강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예금보험공사가 퇴출 금융기관 임직원들을 대상으로 부실책임을 법적으로 추궁하면서부터 은행들의 이러한 무사안일과 배짱대출 관행이 더욱 증폭되고 있다.

집권 초기에 정부는 금융기관에 주인을 찾아주자고 했다. 그 주인이란 재벌 총수와 같은 사람이라고 했다. 재벌총수는 과연 기업의 주인인가? 한보, 청구, 동아, 진로, 삼미, 대우 등 수많은 기업에 기업주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 주인(?)들은 기업을 이용해 은행돈을 빌리고, 그 빌린 돈을 갚지 않았다. 빌린 돈도 근로자들이 번 돈도 그들에겐 비자금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기업을 부실로 만들어 국민에게 던져버리고 사라졌다.

위와 같이 행동한 기업인들은 기업을 사리사욕에 이용한 사람들이지 결코 주인이 아니었다. 은행에 주인을 찾아줘야 한다는 말은 바로 이럴 수 있는 기업주들에게 은행을 맡기자는 것이다. 은행이나 기업에 1인 총수 제는 없어야 한다. 주인은 여러 사람들이어야 하고 1인 총수 제가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하는 시스템이 가동돼야 한다. 은행에 주인을 찾아 줘야 한다는 말은 적절치 못하다. 은행에 시스템을 만들어 줘야 한다는 말이 적절한 말이다. 공공 기업은 시스템에 의해 경영되어져야 하는 것이지 주인들의 발언권들만 있다고 해서 경영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또한 막상 모든 재벌들이 빚을 지고 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도 한국사회에는 은행의 주인이 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정부는 초기에 은행에 주인을 찾아줘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러한 희망과는 달리 정부는 공적자금이라고 불리는 맹물 통장을 가지고 가장 큰 은행들로부터 국유화시켰다. 거꾸로 간 것이다.

은행은 국민이 저축해놓은 돈을 이리저리 떼이고 경영능력이 모자라 적자를 냈다. 국민이 저금해놓은 돈을 찾으려 하자 은행에는 내줄 돈이 없었다. 예금자들이 맡겨놓은 돈을 내주지 못하면 폭동이 일어난다. 다급한 나머지 정부는 64조라는 천문학적인 맹물을 공적자금이라는 이름으로 은행에 부어주었다.

예금보험공사는 IMF 직후에 재정경제부 산하에 설치된 국가기관이다. 예금보험공사는 60조 규모의 공적자금을 은행에 털어 넣었다. 그래서 서울은행 지분의 98%, 제일은행 지분의 97%, 국내 최대은행인 한빛은행 지분의 75%, 조흥은행 지분의 87%, 한아름종금, 한아름금고 및 신충북금고의 100%, 서울보증보험의 94%, 대한생명의 100% 그리고 한국투신과 대한투신의 100%를 보유해 버렸다. 그리고 대우에 31조를 더 털어 넣을 모양이다. 그 결과 예금보험공사는 자산가 220조 이상의 대규모 기업 집단을 거느리게 되었다.

공적자금이란 무엇인가? 재경부가 국회의 동의를 얻어 IMF 이후 신설된 예금보험공사와 자산관리공사의 두 통장에 각기 32.5조와 31.5조의 입금액을 적어 넣어준 단순히 기록으로 만들어진 자금이다. 국민 각자가 가지고 있는 통장에 기록돼 있는 예금 잔고는 땀을 흘려 저축한 돈이지만 위 두 기관에 나누어준 통장에 기록된 64조는 정부가 저축해놓은 돈도 아니고 누구로부터 빌린 것도 아니다. 그냥 권력의 힘으로 통장에 기록해준 낙하산 식 입금액일 뿐이다. 정부가 국민이 저금한 돈에 맹물을 탄 것이다.

공짜로 이 엄청난 자금을 받은 은행은 그 통장에서 자금을 헐어내 쓰고 있다. 그 통장을 가지고, 예금자가 청구하는 금액도 내주고, 부실기업에게도 또다시 대출을 해주고 있다. 은행이 그 맹물을 다시 밖으로 뽑아내 버리면 우리가 저축해놓은 돈의 가치는 그대로 보존된다. 그러려면 은행의 경영능력이 획기적으로 향상돼야 한다. 그러나 은행의 경영능력은 조금도 발전하지 못하고 있다.

은행의 경영이 획기적으로 향상되지 않고 지금처럼 부실 경영을 계속한다면 어떤 현상이 나타날까? 국민이 은행에 농도 100%짜리 주스 1리터를 맡겨놓았다 하자. 그 돈을 내년에 찾으면 아마도 농도 70% 짜리 주스 1리터를 찾을 것이다. 후년에 찾으면 예를 들어 농도 40% 짜리 주스 1리터를 찾게 될 것이다. 불과 몇 년 후에는 아마도 색깔만 노란 맹물 1리터를 찾게 될 것이다. 정부가 공적자금 제도를 계속 사용하는 한 이러한 현상은 불가피하다.

이러한 현상을 피하기 위한 유일한 길은 공적자금 제도를 하루라도 빨리 중단하는 길뿐이다. 그런데 매우 안타깝게도 은행들이 획기적인 과학화의 길을 가지 않고 있기 때문에 공적 자금은 매년 들어가야 할 처지에 있다. 2000년도에는 또 다른 38조의 국채를 발행한다고 한다. 국채가 팔리지 않으면 또 다시 공적 자금이라는 맹물을 탈 수 밖에 없어 보인다. 2000년도 말 국채 규모는 공표 된 금액만 해도 91조가 된다고 한다. 그러나 그때가 되면 빚은 그 이상으로 늘어날 수 있을 것이다. 현재까지 진 빚만 해도 연간 국가예산과 맞먹는 금액이며 이자만 해도 12조를 넘어 연간 국방비와 맞먹는다. 격심한 인플레가 염려되어지는 시기인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금융기관들은 소매금융, 기업금융, 국제금융 등의 핵심역량을 키우는 일에는 아직 손조차 대지 못하고 있으며, 금융 인들에 대한 교육이나 훈련도 과거 그대로다. 선진국 금융 인들이 분석 능력으로 무장해서 전문가로 훈련되는 동안 한국의 금융 인들은 아직도 2-3주간의 연수과정을 통해 해묵은 연수교재를 소개받는 게 전부다.

감독 당국의 지시만을 쳐다보면서 간단한 대출업무만을 취급해왔기 때문에 그들에겐 새로운 업무를 개발할 수 있는 지식이나 시스템을 개발할 수 있는 능력이 길러지지 못했다. 경영진을 새로 임명하는 것도 정부의 낙점을 기다리고 있다. 워크아웃 기업에 대한 채권단의 자율조정 조차 정부의 간섭을 기다리고 있다. 그들은 감독기관의 명령 없이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도록 체질적으로 길들여져 있다.

금융 시스템을 획기적으로 개선시키지 않는 한 한국의 금융기관과 기업들 모두가 총체적인 도덕적 해이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며, 이러한 도덕적 해이는 국가 전체의 경쟁력 상실로 이어져 만성적인 경제 공황으로 이어질 수 있다.


Prev	더욱 심해진 관치 금융	지만원


Next	경제 개혁의 현주소	지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