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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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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초보적인 시스템: ISO-9000

영국에서 지브러기(Zeebrugge)호로 명명된 초고속 여객선이 손님을 가득 싣고 떠났다. 수많은 문들 중에 몇 개의 문이 채 잠겨져 있지 않은 상태에서 빠른 속도로 커브를 틀다가 많은 인명이 바다로 빠졌다. 검찰이 누가 범인지를 찾아내려 했지만 딱 부러지게 어느 한 사람의 잘못이라고 단정할 수 없었다. 문단속을 책임진 직원들은 그 날 승객이 원체 많아 이리저리 바쁘게 뛰어다니다 배가 출발할 때까지 미처 문을 잠그지 못했다. 그 날은 평소에 비해 승객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에 선장이 이를 감안하여 평소보다 더 많은 시간을 고려해 줄 것으로 믿었다. 따라서 검찰은 승무원들에게 죄를 물을 수 없었다. 수사의 초점은 선장을 향했다. 하지만 선장에게도 죄를 물을 수 없었다. 여객선의 이미지 관리에 가장 중요한 것은 정시출발이며 선장은 정시출발이라는 원칙을 준수했다고 항변했다. 사고로 수많은 승객들이 참변을 당했지만 국가는 아무도 처벌할 수 없었다.

영국 정부는 사고의 원인이 시스템 부재에 있었다는 결론을 얻었다. 선장과 문단속 요원간에 의사를 전달하는 통신 기기도 없었고, 출발 전에 체크해야할 업무 절차도 마련돼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 발견됐다. 이 사고를 계기로 영국 정부는 시스템 운동을 전개했다. 많은 인명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병원, 학교, 수송시설, 기업, 백화점, 호텔 등에 최소한의 안전과 품질을 보장할 수 있는 시스템의 설치를 강요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영국표준(BS5750)이었고 이는 다시 국제표준인 ISO 9000 시리즈로 채택됐다.

우리나라는 최근 이와는 비교가 될 수 없을 만큼의 대형참사들을 당했다. 여객기 추락사, 성수대교 붕괴, 삼품 참사, 대구 지하철 참변 등 수많은 사고를 당하고도 우리는 이에 대한 근본 대책을 세우지 않고 있다. 대통령은 ‘뼈를 깎는 아픔’이라며 말 한마디로 때우고 검찰은 하위직 공무원 몇 사람들만 가두었다가 슬며시 풀어주곤 했다. 영국처럼 공공시설에 대한 안전표준도 설치하지 않았다. 그래서 유사한 사고는 지금도 반복되고 있다.  한국에서는 인명이 시스템에 의해 보장받고 있는 게 아니라 확률에 의해 운 좋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사고가 나면 언론매체들은 요란하게 징과 꽹과리로 센세이셔널 한 잔치만 벌인 후 후속조치 추적을 바라는 국민의 여망을 저버린 채 우르르 다른 잔치로 몰려간다.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결국 한국인들은 값비싼 사고로부터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한 채, 내일의 사고를 기다리고 있다.

  이처럼 한국인들은 시스템 개념을 도외시하기 때문에 선진국에 비해 많이 죽고, 국제경쟁에서 기업도 밀리고 정부도 밀리고 운동도 밀린다. 축구를 보자. 한국인 감독은 ‘포지션 축구’를, 히딩크 감독은 ‘시스템 축구’를 추구했다. 한국인 감독의 축구는 시너지를 내지 못하는 축구였고, 히딩크의 축구는 시너지를 내는 축구였다. 포지션 축구에서는 “나는 내 포지션만 잘 지키면 된다"는 사고방식을 전제로 한 것이어서 잘못은 남에게로 전가됐다. 모든 선수는 자기 포지션에서만 뛰어야 하고, 그래서 한 공간에는 오직 한 사람의 선수만 뛰었다. 한 선수가 여러가지 기능을 수행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시스템 축구에서는 한 선수가 여러 기능을 수행하고, 여러 포지션에서 뛰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부족한 부분을 내가 채워주고, 내가 부족한 부분을 다른 사람이 채워주는 소위 "올 코트 프레싱"을 전개한다. 그래서 체력강화, 능력의 다양화가 필요했던 것이다.

시스템 축구를 하기 위해서는 전략을 개발하고 개발된 전략을 모든 선수가 완전히 소화해야 한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모든 선수들의 지혜와 참여가 필요하고 이는 다시 선수와 선수간에 자유로운 의사소통이 전제돼야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 선수들 사이에는 두꺼운 벽들이 있다. 상하간에는 말을 건네기조차 싫어하고 상급자를 가급적 회피하려 한다. 질문이 있어도 무능하게 평가될까, 혹은 귀찮게 군다는 인식을 주지는 않을까 염려한 나머지 오직 상급자들의 비위만 거스르지 않으려 노력한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대화와 토의가 있을 수 없고, 창의력이 있을 수 없다. 어제의 문제로부터 배울 수도 없으며 조직의 성과가 날로 커질 리 없다. 히딩크 감독은 바로 이런 냉랭한 상. 하 관계를 없애고 누구나 다 동등하게 지혜를 짜내도록 하기 위해 커뮤니케이션이 자유자재로 흐르도록 훈련했다. 한국적 상하관계는 발전의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하딩크는 우리에게 리더만 훌륭하면 우리도 얼마든지 잘해 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여주었다. 리더가 훌륭했을 때 우리는 전쟁의 잿더미 위에 곧바로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고, 리더가 도둑질에 여념이 없을 때 우리는 추락했다. 히딩크는 또 우리 모두에게 포지션축구와 하루빨리 결별을 고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아직도 우리의 기업조직, 우리의 정부조직 모두가 포지션축구 개념으로 편성돼 있고 또 포지션 게념으로 운영되고 있다. 각자에게 포지션을 정해주고 그 포지션에서 열심히 뛰라는 것이 한국인들의 조직 운용개념이다. 이런 조직이 바로 기능 조직(Functional Organization)인 것이다. 회계과에 회계인들만 모여있는 것이 기능조직이다. 하나의 프로젝트, 하나의 제품을 완성하고 판매하기까지에 여러 기능을 가진 사람들이 팀을 만들어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프로젝트나 제품이 여러 기능부서를 컨베어벨트처럼 옮겨다니는 것이다. 마치 축구공이 레프트윙에서 라이크윙으로 패스되고 있는 것처럼!

축구의 승패가 시스템의 산물인 것처럼 제품과 서비스 역시 시스템의 산물이다. "사고를 줄여라", "의식을 개혁하라", 정신 좀 차려라", "상품과 서비스의 품질을 높여라"하고 외칠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될 수밖에 없도록 시스템을 갖추라는 것이다.

고객으로부터 받은 사양서 100장 중 한 장이 어디로 사라지면 설계에 중요한 에러가 생긴다. 엉뚱한 사양서나 설계도가 설계실로부터 공장으로 불출되면 불필요한 부품이 만들어진다. 정식 직원이 쓰던 기계를 임시직원이 사용하면 기계가 고장난다. 식품을 만드는 업체에서 내용물을 집어넣는 전문가 수는 많지 않다. 잠시 그가 화장실에 간 사이에 누가 눈대중으로 내용물을 적당히 집어넣으면 엄청난 양의 식품이 생산되자마자 버려져야 한다. 이처럼 어처구니없는 실수에 의해 사고는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다. 이 최소한의 시스템을 규정해 놓은 것이 바로 ISO9000이다.

일본의 데밍상 총점은 1,000점 만점이다. 이를 본 따 만든 미국의 말콤발드리지상의 총점 역시 1,000점이다. ISO-9000은 이 1,000점의 30%에 불과한 300점을 만점으로 한다. 따라서 ISO 9000 검사에 합격했다고 해서 그 업체가 훌륭한 업체로 간주되지는 않는다. ISO-9000 인증을 받은 업체들도 너무나 많은 불량품을 만들었다. ISO 9000은 QC의 극히 일부일 뿐 QC의 핵심은 아니다.

                   2003. 5.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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