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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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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을 먹여 체중을 늘려준 낯선 대령

며칠 후에 경복고등학교 건물에서 필기시험이 있었다. 시험 첫날 아침. 홍시 하나로 아침을 때우고 용두동에서 버스를 타서 광화문에 내렸다. 너무 긴장해서인지 내리자마자 위경련이 시작됐다. 병원에 들려 진통제를 맞긴 했지만 위가 쥐어뜯고 골이 뻐개지 듯 아팠다.

하필이면 가장 자신 있던 물리와 수학이 들어있는 날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를 생각하니 불길한 생각이 앞섰다. 첫날의 시험을 망쳤다. 그 다음 이틀 간의 시험이 시들해졌다. 육사를 포기하고 후기대학중의 하나인 성균관 대학을 지망해서 합격통지서를 받긴 했지만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육사로부터 합격통지서가 날아왔다. 상상 밖의 일이었다. 긴장이 풀리면서 일주일간 심한 독감을 앓았다. 독감이 채 낫기도 전에 제2차 체력검정 시험을 치러야 했다. 체력검정 내용은 신체검사를 다시 한번 반복한 뒤에 턱걸이. 역기. 장거리구보. 넓이뛰기 등의 능력을 실시하는 것이었다.

2차 신체검사는 육사 지구병원에서 실시됐다. 또다시 그놈의 신장기가 크게 부각됐다. 바로 앞에 서있던 학생은 보기에도 나보다 키가 큰 것 같은데 키 부족으로 불합격판정을 받았다. 나는 넋빠진 상태가 돼버렸다. 그 순간 누군가가 나를 체중기 앞으로 밀었다. 키는 재지 말고 체중을 재라는 것이었다. 영문모를 일이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누군가가 와서 "야, 시간 없어, 빨리빨리 해" 하고 소리를 친 것 같았다. 신장 담당 하사관은 내 키가 충분한 수치로 기록돼 있어서 바쁜 마음에 재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아니면 옛날 육군병원에서 나와 신랑이를 벌였던 그 하사관이 나를 기억해주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그 키재는 하사관이 혹시라도 마음이 변해 나를 다시 잡아당길까 무서워 얼른 체중기 위에 올라섰다. 1차 신체검사 때 나는 체중에 대해서는 걱정 없었다. 그러나 일주일간의 심한 독감으로 체중이 3kg씩이나 증발돼 버렸다. 체중을 재는 하사관은 조금의 배려도 없이 "불합격!"을 외치며 도장을 찍어버렸다.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었다. 나는 또다시 넋 나간 상태가 되었다. 휑하게 뚫린 검은 눈에 순간적으로 주먹만한 눈물이 고였다.

"야, 비켜"

하사관이 소리를 쳤지만 나는 체중기 옆에 얼어붙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야, 안 들려? 비키라니까"

바로 이때 키가 나만큼이나 작고 통통하게 생긴 대령 한 분이 나타났다.

"여기 요놈 무엇 때문에 그러냐?"

하사관이 사정을 설명했다.

"요놈 용지는 따로 뽑아놓아라. 내가 물 좀 먹여 가지고 올 테니"

그분은 치과 사무실에서 주전자를 들고 나와서는 나를 화장실로 데려갔다.

"네놈은 이 물을 다 마셔야 해"

갈증도 나지 않는 데다가 몸살을 앓고 난 검부재기 같은 몸으로 물을 생으로 마신다는 것은 그야말로 고통이었다. 죽기살기로 마셨다. 그 분도 안타까운 모양이었다. 내 손목을 끌고 나와 체중기 앞에 세웠다.

"요놈 체중을 다시 재봐라"

배가 터지도록 마셨지만 겨우 1kg 남짓 보탰을 뿐이었다.

"아직 안되겠나?"

나를 다시 화장실로 데려갔다. 겨우 5백 미리 정도를 더 마셨다. 미달일 줄 뻔히 알면서도 그분은 나를 데리고 세 차례나 화장실과 체중기 사이를 왕복했다. 그제서야 그 하사관도 생각하는 바 있었던지 "대령님, 이제 됐습니다"하고 정정란에 도장을 찍어 주었다. 그 분은 나의 등과 머리를 여러 번 쓰다듬어 주고는 어디론가 가버렸다.

나는 신체검사의 최종 합격여부를 결정하는 판정관 앞에 섰다. 그 판정관은 놀랍게도 키를 봐준 바로 그 미남 소령이었다. 구세주를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토끼 눈으로, 나는 그 소령에게 절을 꾸벅 했다.

"너 앓았구나. 입교해서 공부 잘해"

그는 웃는 얼굴로 신체검사 용지에 마지막 도장을 꾸욱 눌렀다. 너무나 고마워 나는 그에게 허리를 두 번씩이나 굽히면서 뒷걸음으로 문을 나왔다. 꿈에서나 있음직한 아슬아슬한 악몽이었다.

물배를 안고 병원에서 연병장으로 걸어갔다. 500m 거리였다. 발을 뗄 때마다 배에서 물이 출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 물배를 안고 어떻게 장거리를 뛰지?'

앞이 캄캄했다. 턱걸이로부터 시작됐다. 얼마나 긴장을 했던지 턱걸이를 한다는 것이 배걸이를 했다. 턱이 걸려 있어야 할 철봉대에 배가 걸린 것이다. 지켜보던 사람들이 폭소를 터트렸다. 얼굴이 원체 초췌해서였는지 대위 시험관이 조교에게 나를 내려주라고 지시했다.

"아, 그 학생은 됐다"

남아있는 4회의 턱걸이를 면제시켜 주었다. 역기도 다섯 번을 들어올려야 했지만 그 대위는 한 번만 들게 해주었다. 기세로 보아 첫 회만 보아도 판단이 간다는 인상이었다.

드디어 2km를 뛸 차례가 왔다. 20명 틈에 끼어 출발선상에 섰다.

'뛰다가 뱃살이 꼿꼿해지고, 힘이 모자라 나도 모르는 사이에 졸도라도 하면 어떻게 하지?. . . . .'

어렸을 때에는 손기정 선수처럼 되어보겠다고 동네 꼬마들과 곧잘 마라톤 연습을 했다. 갈증나는 여름철이라 개울을 건널 때면 엎드려 물을 마셨다. 마시고 나면 여지없이 뱃살이 꼿꼿해져서 뛸 수가 없었다.

호르라기 소리가 들렸다. 물이 출렁이지 않도록 배를 잔뜩 안으로 집어넣고 뛰었다. 한 바퀴를 도는 동안에도 내 몸을 수십 번씩 꼬집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2km를 뛰는 동안 뱃속의 물이 내내 잠잠했다. 6등으로 골인했다.

'아! 이제는 끝났구나!'

대부분의 지망생들에게 신체검사는 하나의 요식 행위에 불과했다. 그들에게는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는 것들이 내게는 첩보영화의 주인공이나 겪을 수 있는 온갖 스릴과 고뇌의 주제들이었다.

2000. 8.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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