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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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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금송아지; 국제 매너

내가 미국에서 다닌 학교는 28개 국가에서 모여든 현역장교들을 학생으로 수용하는 축소된 외교 무대였다. 장교들은 각기 자기 나라를 대표하는 외교관들이었으며, 그 나라의 사회 수준을 나타내는 지표였다. 교실에서는 넥타이를 매야 했고 구내 식당에서도 정장을 해야 했다. 교수들도 학생을 깍듯이 대했고, 학생들은 매 분기 말에 무기명으로 교수를 평가했다. 교수와 학생, 학생과 학생간의 대화는 외교적 수사와 완곡한 표현들이 사용됐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었다. 50분 수업이 끝나면 학생들은 10분 동안에 다음 교실로 바쁘게 옮겨가야 했다. 그런데 어느 교수가 자기도취에 빠져 마칠 시간에서 3분을 초과해가면서 칠판에 수학 기호들을 써내려 가고 있었다. 학생들은 다음 시간에 지각할 일이 걱정되어 매우 초조해했다. 드디어 어느 한  미국학생이 손을 들었다.

"Excuse me, sir" (교수님, 죄송합니다).

교수가 뒤돌아보며 말했다.

"sure" (물론입니다)

"Do you have infinite number of chalks, sir?" (교수님, 분필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으신 가요?)

교수가 놀라 시계를 보더니 웃으면서 말했다.

"Oh, I am sorry. Class dismissed" (아, 죄송합니다. 수업을 마칩니다)

  지금 만일 한국 학생들이 이러한 상황에 있었다면 어떻게 말했을까? 아마도 “교수님, 시간 끝났습니다. 3분이나 지났습니다. 다음 교시에 늦습니다”.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교내식당의 식탁은 6명이 앉는 라운드 테이블이며 흰 식탁보로 덮여 있었다. 그 때만 해도 필리핀 종업원들이 흰 가운에 흰 모자를 쓰고 음식을 일일히 날라다주는 그야말로 황금기(Good Old Days)였다. 오는 순서대로 앉다보니 각 식탁은 자연 낯선 장교들로 채워졌다. 나중에 온 장교가 빈자리에 앉고자 할 때는 정중하게 양해부터 구했다. "May I join please" (앉아도 좋을까요?). “Sure, of course"(물론입니다. 어서 오십시오).

이렇게 새로 앉은 학생은 이미 앉아 있던 학생들에게 악수를 청하며 자기를 소개했다. 국적이 다르고, 학과 코스들이 다르기 때문에 이야기는 상대방 나라에 대한 호기심이나 학과목에 대한 호기심으로부터 시작됐다. 식사를 끝내고도 이야기는 계속됐다. 시간이 아주 바빠서 빨리 일어서야 할 경우에는 테이블 메이트들에게 미안하다고 양해를 구했다.

바로 여기에서 한국인들의 특징이 나타났다. 로마에 가서는 로마인이 되라는 말, 모두가 알고 있지만 로마인이 되려고 노력하는 한국인은 드물었다. 식탁에서 편지를 읽거나 신문을 읽는 학생들은 꼭 한국 학생들이었다. 식사가 끝나자마자 일어서면서도 미안하다며 양해를 구하는 학생도 드물었다. 한국인들은 외국에 나가 남을 배려하거나 체면을 지키는 일에 매우 무디다. 매너를 익혀주고 훈련시켜주는 가정들이 별로 없거니와 학교에서도 이런 매너는 교육시켜주지 않는다. 성정이 거칠어서가 아니라 인격을 표현하는 수단인 매너를 훈련받지 못했기 때문이긴 하지만 국제사회에서는 일단 사람을 매너로 평가한다.  디너 파티에서 자주 보는 현상은 한국인들이 식탁에서는 수준 이하의 매너를 보여주면서도 자기 자랑을 많이 한다는 사실이다. 자기가 한국에서 어떤 지위에 있고, 돈이 얼마나 많고, 자기 조상이 얼마나 훌륭한 지에 대해 자랑을 늘어놓는다.

금요일이면 가끔 초대를 받는다. 통상 외국인들은 여러 커플들을 초대한다. 주인은 현관등에 불을 켜놓고 오는 손님마다 반갑게 맞으며 호들갑을 떤다. 먼저 와 있는 친구들을 하나 하나 진지하게 소개한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외국인들을 소개받을 때 그냥 끄떡 끄떡 고개 운동만 한 후 이내 이름을 잊어버린다. 그 다음 이야기를 할 때는 you 또는 he로 부르며 손가락으로 사람을 가르킨다. 이러한 매너는 멸시받는 매너이지만 한국인들은 그런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잘못을 반복한다.

나 역시 한국에서는 이름을 기억하는 데 익숙해지지 못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나는 파티에 갈 때마다 두꺼운 카드지를 들고 소개받은 사람의 이름을 일일이 메모했다. 몇 번이고 물어서 정확히 이름을 쓴 다음 발음을 교정 받았다. 상대방은 자기 이름을 외우려고 애쓰는 진지한 모습에 호감을 가졌다. 그리고 대화도중 상대방을 지칭할 때에는 반드시 메모를 보고 그 사람의 이름을 불러주었다.

외국인이 한국에 오면 가장 먼저 가르쳐 달라는 말들이 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미안합니다", "맛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초대해주셔서 반갑습니다" 등이다. 이런 말은 상대방에게 예의를 표하는 가장 기본적인 말들이다. 다른 대화내용들은 통역을 통해 하지만 이런 에티켓에 관한 말들은 직접 그 나라말로 표현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그런 말들을 상대방의 나라말로 표현하는 발음기호를 수첩에 받아 적고 여러 번 연습하면서 교정을 받는다. 이는 그 사람이 예의를 존중하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특히 영어를 할 줄 모르는 부인이 남편과 함께 초대를 받으면 바로 이런 표현들을 한글로 써 가지고 직접 표현해야 한다. “댕큐 훠 인바이팅 어스”, “나이스 미팅 유”, “베리 딜리셔스” 등등. 미국에서는 영어를 얼마나 잘 하느냐에 따라 평가받는 것이 아니라 예절에 얼마나 신경을 쓰고 사느냐에 따라 평가받는 것이다. 나머지 대화는 통역을 통해 하면 된다. 외국어를 구사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파티에서 침묵하는 것은 보기에 좋지 않다. 통역을 통해 대화에 적극적으로 끼어들려는 태도가 그 사람의 신분을 말해주는 것이다.

매너에 세련될수록 물어보기를 즐긴다. 초대한 집에서 화장실을 사용할 때도 반드시 허가를 받아야 한다. "화장실을 좀 사용해도 될까요?". 초대된 남자가 이렇게 물으면 안 주인이 화장실을 안내하면서 물을 트는 요령을 일러주고 비누와 수건의 위치를 일러주고 ‘플리즈’ 하면서 돌아간다. 별로 떳떳한 곳도 아닌데 방송을 할 것까지 있느냐며 슬며시 다녀오면 신분이 낮아진다.

미국인 장교들은 화장실에 갈 때마다 머리 빗을 꺼내 머리를 빗었다. 빗으로 빗으면 머리결이 깨끗해 보이기 때문이었다. 빗 대신 손으로 머리를 문질러 넘기면 덕지덕지해 보인다. 나도 그들을 따라 이렇게 했다. 냄새를 피하기 위해 김치는 가급적 주말에만 먹고 옷과 머리에는 은은한 향수도 쳤다. 개별적인 질문이 있어서 교수를 찾아갈 때에는 더더욱 냄새와 복장을 관리했다.

외국인들과의 사교에 있어, 언어와 매너는 필요조건일 뿐이다. 매너는 포장이요, 언어는 표현수단일 뿐, 자신의 머리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를 표현하려면 대화내용이 풍부하고 전달력이 있어야 한다. 재미도 있어야 한다. 나는 사관생도 때, 외출을 나가지 않고 많은 시간을 원서를 읽는 데 사용했다. 주로 소설과 위인전이었다. 월남에서도 작전을 나갈 때마다 철모 속에 영문 단편소설을 넣고 다녔다. 멋있는 표현들은 따로 써놓고 외워보려 노력했다. 그 후 20여 년이 지나고 보니 머리에 남아 있는 건 별로 없었다. 하지만 그때에 형성됐던 분위기와 감정은 머리 속의 어느 한 호수 같은 공간에 영어권 문화를 심어놓았을 것이다.

파티의 초반은 미국인 친구들이 이끌어 갔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파티의 주도권은 저절로 내게 넘어오곤 했다. 그들은 현실을 말했고, 나는 꿈을 말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속해 있던 어느 한 조그만 미국 마을에서 조용한 엔터테이너가 될 수 있었다. 사교계는 언제나 부인들이 주도했다. 나의 박사 논문 지도교수 부인은 나와 그의 남편이 벌이는 코미디를 즐기며 나를 베이비라 불렀고, 나의 스폰서 교수 부인은 내가 방문할 때마다 두 팔을 벌리고 맨발로 뛰어나와 나를 포옹하고 키스까지 해주었다.

1988년, 나는 미해군대학원 교수로 있으면서 벙쿠버에 있는 미공군기지에 견학을 갔다. 비행단 부단장인 대령이 나를 안내했고, 그날 밤 대령 부부가 나를 장교 클럽에 초청했다. 내 말을 듣다가 대령 부인이 갑자기 내 팔을 잡았다. 그리고는 처음 보는 외간 남자의 팔을 잡았다는 생각이 들자 이내 얼굴을 붉히며 이렇게 얼버무렸다.

"Oh, my God! I'm touching you. I am not supposed to touch a strange man, You are entertaining me, you know president Ragan, You are like Ragan, He is entertaining man!"

우리가 읽는 한 권의 책은 많은 것을 남겨줄 수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자기가 되고싶어 하는 인간상을 바라보고 노력한다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책들은 사람들을 그렇게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재미를 위한 독서는 시간을 죽이지만 자기 고유의 문화를 가꾸기 위한 독서는 사람의 향기를 바꾸어 놓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국제인들 사이에서 살아가야 한다. 국제교류에서 고립되면 낙후할 수밖에 없다. 스스로를 갈고 닦은 사람은 국제무대에서 나비처럼 날아다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무대의 한 구석에서 열등의식을 키우면서 무대의 나비들을 질투하고 배척할 것이다. 우리 사회는 옛 문화와  옛날의 금송아지에 대해 자랑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고 있다. 하지만 옛 문화가 훌륭한지 아닌지는 오늘의 매너 그리고 인간적 향기가 외국인에게 어떻게 인지되느냐에 따라 평가될 것이다.

2001. 3.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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