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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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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나의 산책세계)

                                                                           머리말


하늘이 웅덩이만큼만 열려있는 강원도 산간마을에서 태어난지 13년,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는 동네 형들을 따라 홀홀 단신 상경하여 고학으로 야간학교를 나와 육사를 갔습니다. 당시 육사는 가난한 학생들이 꿈꾸던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사관학교 때 독서를 좋아했습니다. 토요일이 되면 도서관에 가서 좋은 책을 고르느라 여러 시간을 보냈습니다. 가장 훌륭한 스승도 책 속에 있었고, 가장 되고 싶어 하는 인간상도 책 속에 있었습니다. 자유인! 제가 독서 속에서 찾아냈던 표상이었습니다. 육사 생도의 가슴에 4성 장군이 자리 한 것이 아니라 자유인이 자리한 것입니다.

자유! 저는 출세보다 자유가 좋았습니다. “창살 없는 감옥”이라는 군대에도 자유공간은 있었습니다. 열심히 살다보니 자유공간이 확보됐습니다. 더 많은 자유가 갖고 싶었습니다. 풀 섶에 숨어 있는 이름 모를 야생화처럼, 누구의 눈에나 쉽게 뜨이지 않고, 방해도 받지 않는, 오붓한 자유공간을 꿈꾸면서 저는 44세의 한창 나이에 대령이라는 제도권의 굴레를 훌훌히 벗어던지고 "영원한 자유"를 찾아 제2의 인생을 시작했습니다.

그 후 저는 새로운 지식을 흡수하여 정리하는 글쟁이가 되었습니다. 조각가가 조각을 할 때에는 ‘삼매경’에 빠집니다. 저 역시 글을 쓸 때에는 그런 삼매경에 빠집니다. 조각가가 심혈을 기울여 조각물을 완성해 놓고 느끼는 희열과 만족감! 제게도 그런 게 있었습니다. 저는 제가 써 놓은 글을 가장 사랑합니다. 읽어도 읽어도 좋습니다. 최선을 다해 조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날이 갈수록 글 쓰는 능력이 향상돼 갈 때, 저는 행복을 느낍니다. 일간지가 부탁한 글을 써내면 다음 날 아침이, 소풍 날처럼 기다려졌습니다. 조각가에게 출세의 자리가 열려있을 때에 조각가는 단호히 거절합니다. 몇 년간의 외도가 그의 창의력과 행복을 정지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런 창의력과 행복을 중단하고 싶지 않아 저 역시 모든 기회를 거절하면서 오직 글 쓰는 생활만 했습니다.

세상 바람이 아무리 모질게 몰아쳐도, 가슴을 아름답게 가꾸며 낭만 있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수많은 가슴속에 많은 것을 남기고 갑니다. 출세나 재산 모으기에 최고의 가치를 걸고 좁은 공간에서 각박한 삶을 살아가는 인생이 있습니다. 그는 그에 충성을 맹세했던 사람들의 가슴조차 적셔주지 못하고 마른 갈대처럼 쓸쓸히 사라집니다. 많은 이들이 유명인사(somebody)가 되려고 하지만 정말로 인생을 아끼는 사람들은 무명인(nobody)으로서의 여유와 행복을 음미하며 살아갑니다. 자유와 멋과 낭만이 흐르는 무명인으로서의 삶을 가꾸어 갈 때에 우리는 비로소 신선한 향기를 선사하는 살아있는 꽃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독서 속에서 저는 이런 인생을 발견해 냈습니다.

20대 초반에 황야의 무법자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클린트이스트우드가 주연이었습니다. 황야를 울리는 그의 휘파람이 좋았습니다. 거칠 데 없는 자유분방함에 매력을 느꼈습니다. 인습과 통념에 얽매이지 않고 오직 스스로 정한 자기 규율에 따라 거칠 것 없다는 듯이 행동하는 그 영혼이 부러웠습니다. 최 고수의 총잡이 실력을 기르지 않았다면 그렇게 넓은 자유공간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 후 약 40년간 저는 인습과 통념과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는 이런 자유인이 되기 위해 극기의 고개를 여러 개 넘었습니다.

60대에 들어서면서 영화 타이타닉을 보았습니다. 영국의 거미줄 같은 상류사회 규범에 얽매여 숨막혀하는 로즈의 영혼을, 자유분방한 영혼을 가진 잭 도슨이라는 하류사회 청년이 해방시켜주는 감동적인 드라마였습니다. 그는 매일 매일을 기억할 수 있는(make everyday count) 삶으로 채웠습니다. 그런 자기기율(self discipline)이 없었다면 로즈의 영혼을 사로잡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잭 도슨의 자유분방함이 바로 제가 그리던 삶의 모습이었습니다. 인습과 통념을 뛰어넘는 잭 도슨의 자유분방한 영혼이 바로 예수님의 영혼을 닮았다는 생각, 귀밑머리 희어지는 지금에서야 비로소 해봅니다.

“인생은 나이로 늙는 것이 아니라 이상의 결핍으로 늙는다. 세월은 피부에 주름을 보태지만 열정을 잃으면 영혼에 주름이 진다. 자신을 냉소와 증오와 오기 속에 가두어 두면 20세의 늙은이가 되고, 경이에 대한 찬미, 미래에 대한 호기심, 삶에 대한 환희를 간직하면 80세의 젊은이가 된다.” 사무엘 울맨의 시처럼 저는 청년의 영혼을 간직한 채 아직도 남아 있는 길을 갑니다.

제가 걸어온 인생행로는 넓은 백지에 가는 펜으로 그은 꼬불꼬불한 선에 불과합니다. 그 선을 이 책에 조각해 보았습니다. 이 책은 작은 저를 크게 보이도록 각색하고 미화시키기 위한 자서전이 아닙니다. 미화할 재료가 제겐 별로 없습니다. 생각하기 전에 행동부터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면에 먼저 생각하고 생각대로 행동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름다운 인생행로를 먼저 그린 다음 그 그림대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저는 그리 아름답게 살지는 못했어도 아름답게 살고는 싶었습니다. 이 책에는 그런 꿈들이 조각돼 있을 것입니다.

이 책이 꿈을 가꾸는 젊은이들에게 하나의 의미 있는 삶의 모델이 될 수 있다면, 그리고 인생을 뜻있게 가꾸며 살아온 기성세대에 추억을 반추케 하는 하나의 매체가 될 수 있다면 저는 사랑받는 또 하나의 조각품을 완성했다는 행복에 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2004.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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