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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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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해후-1

(기적의 순간)

목련꽃 피어있는 일요일 아침. 서양란은 모처럼의 느긋한 시간을 침대 위에서 보내고 있었다. 거실 TV에서 갑자기 낯익은 이름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용수철처럼 몸을 일으켜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던 스물 두 살 난 딸아이에게 숨가쁘게 물었다.

"민경아! 이제 금방 책을 쓴 저자가 고학식이라고 했니?"

"몰라, 엄마, 아마 그랬었나봐"

"얘, 그 책이름이 뭐랬지? 지식 경영 시대라 했니?"

"어유, 엄만 귀도 밝아? 그런데 왜 그렇게 갑자기 긴장씩이나 하고 그래?"

민경이는 장난 끼가 졸졸 넘치는 눈으로 엄마를 바라봤다.

"얘, 바로 그 사람일지도 몰라"

"뭐? 엄마가 열 다섯 살 때 짝사랑했었다는 바로 그 남자?"

"쉬잇! 그래, 그래, 바로 그 사람"

민경이가 열 다섯 살 나던 해에, 서양란은 남편과 심하게 말다툼을 했다. 사실 그건 말다툼이 아니라 서양란이 일방적으로 당한 모욕이었다. '저 사람, 원래 그런 사람인걸' 하면서도 그날만큼은 마음이 무척 상했다. 남편이 출근하자 그녀는 남편의 베개를 방바닥에 내려놓고 발로 차고 밟으며 분풀이를 했다.

'내 일생은 뭔가? 지나온 세월도 억울한데 앞으로 저 사람과 이런 식으로 죽을 때가지 같이 살아야만 하나?'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서러운 마음이 폭발했다. 서양란에게 남편은 신뢰의 대상이 아니라 게임의 상대였다. 행여 약점이라도 잡힐까 잔머리를 굴려야 했던 지난 날의 결혼 생활이 이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만큼 지겹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운했던 과거가 새록새록 부각되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차라리 남편 없이 아이들과 따로 나가 살고도 싶었다.

"이혼녀!". 그것이 가장 큰 족쇄였다. '저 여자 이혼녀래, 한번 시도해 보라구',
여기까지만 생각해도 남자들의 느끼한 시선들이 그녀의 목덜미에 꽂히는 것만 같아 벌써부터 몸서리를 쳤다. 진퇴양난, 비전 없는 회색 빛 미래가 더욱 더 그녀의 마음을 답답하게 조여왔다.

흐느껴 우는 엄마의 모습을 지켜보는 열 다섯 살 난 민경이의 가슴도 아팠다. 무릎으로 다가가 엄마의 뺨을 조심스레 만져주었다.

순간 그녀는 민경이를 와락 끌어안았다. 가슴을 파고드는 민경이가 뿌듯하게 느껴지는 순간 그녀의 설움은 또 한 차례 반복됐다. 민경이도 흐느껴 울었다.

그녀는 민경이를 데리고 이웃 공원으로 나갔다. 어느 정도 기분이 풀리자 민경이가 궁금증을 털어놨다.

"엄마는 아빠랑 어떻게 결혼했어? 연애했어? 엄마 어릴 때 얘기 좀 들려 주라"
어리광이 잔뜩 배여 있는 말투로 민경이가 채근했다. 이어서 서양란은 그녀의 어린 시절과 첫사랑을 회상해주었다.

(엄마의 어린 시절)

"외할머니는 1남 2녀를 낳으셨단다. 쌍둥이 딸과 사내 아이였단다. 별로 어렵지도 않은 집안이었지만 두 쌍둥이는 계집애라는 이유로 네 외할머니로부터 천대를 많이 받았단다 . . . . . . .".

"어유, 저 웬수들 왜 태어났나 몰라"

툭하면 엄마한테서 나오는 말이었다.

뜨거운 여름날이면 사람들은 그늘과 바람을 찾아 밖으로 나왔다. 엄마는 찬밥 한 덩이에 김치 몇 쪽을 공기에 담아들고 벽돌 담 밑에 얇게 드리워진 그림자 속에 쪼그리고 앉아 쌍둥이에게 번갈아 가며 떠 먹였다. 물에 헹구면 될텐데 엄마는 김치 쪽을 입에 넣고 쪽쪽 소리가 나도록 빨아 먹였다.

밥을 먹고 난 두 여식은 무릎 높이의 돌담 둑에 올라서서 사내아이처럼 소변을 보았다. 누가 멀리 보내는가를 시합한 것이다. 두 쌍둥이는 양쪽 손으로 어린 비너스 둔덕을 힘껏 누르고 활처럼 몸을 뒤로 제켰다.

아무리 해도 소변은 다리를 타고 줄줄 흘러내리기만 했다. 드디어 말썽 많고 소란스러운 언니 쌍둥이가 둔덕에서 거꾸로 떨어졌다. 얼굴과 머리에 상처가 나고, 소변으로 젖어있던 사타구니와 발바닥에 검은 흙먼지가 엉겨붙었다.

뒤에서는 더 어린 아기가 빽빽거리고, 계집애는 흙투성이가 된 채, 피를 흘리고 있으니 엄마 입에서 저절로 욕이 튀어나왔다.

"어유, 이 웬수들, 차라리 뒤져 버려라"

속 터지는 엄마는 다쳐서 우는 아이를 달래기는커녕 주눅이 들만큼 소리를 지르고 쥐어박았다. 이 꼬마들이 바로 서양란과 서양미였다. 같은 쌍둥이라도 엄마는 비교적 요란스러운 서양란보다는 조용하고 말수가 적은 서양미를 더 미워했다. "공연스레 나중에 따라나와 속을 썩히는 가시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어느 날부터 집안에 놋쇠 그릇이 없어지기 시작했다. 쌍둥이가 아이스크림을 사먹었기 때문이었다. 놋쇠 그릇 하나에 아이스크림 12개씩 주었다. 쌍둥이는 하루에 하나씩의 그릇을 나눠들고 나갔다. 초등학교 1학년 때에 한 아이 당 12개씩의 아이스크림을 받았으니 먹는 속도보다 녹는 속도가 빨랐다.

놋쇠 그릇은 자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서 엄마는 그릇이 없어진 사실을 한동안 모르고 지냈다. 어느 날 엄마가 놋쇠 그릇을 찾았다. 그 많던 그릇이 모두 없어졌으니 황당할 노릇이었다. '도둑이 들었나?' 꼬마들을 닥달했지만 이들은 고개만 가로 저었다. 심증은 가지만 증거가 없으니 때릴 수도 없었다.

"어유, 저 웬수들, 썩나가지 못햇?"

하루는 다락에서 포도냄새가 진동했다. 특히 서양란은 생쥐 같이 냄새도 잘 맡았다. 코를 벌렁거리며 냄새나는 곳을 찾아냈다. 한 송이를 통 채로 훔쳐다 먹었으면 좋았을 테지만 그녀는 잔머리를 굴렸다.

이 송이에서 한 개, 저 송이에서 한 개씩의 포도 알을 따먹었다. 엄마가 오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수시로 대문을 들락거리면서 몇 알씩 따먹었다. 포도송이마다 따먹은 자국이 생기자 서양란은 먹은 부위를 가위로 잘라냈다.

그 포도송이는 귀한 손님을 위해 엄마가 큰 맘 먹고 사다놓은 것이었다. 손님이 오자 엄마는 흉하게 변해버린 포도송이를 보고 펄펄 뛰었다. 손님이 간 다음 쌍둥이가 또 지목의 대상이 됐다. "야, 이 웬수 같은 년들아, 느년들이 또 이래놨지?"

포도 알을 따먹은 서양란이나, 포도라면 구경조차 해보지 못했던 서양미는 엄마의 성난 시선을 빤히 쳐다본 채 고개만 가로 저었다. 서양란이가 더 많은 지목을 받았다.

"네년의 소행이지?"

"엄만 왜 툭하면 나만 갖고 그래?"

그녀는 갑자기 부엌으로 나가 과도를 갖다 엄마에게 주면서 "정 그러면 갈라봐?"하고 배를 활처럼 내밀었다.

엄마는 좋은 음식이 생기면 감춰뒀다가 늦은 밤에 아버지가 들어오시면 몰래 드렸다. 감각이 느린 동생은 일찌감치 잠이 들었지만, 눈치가 빠른 쌍둥이들은 밤늦도록 이불 속에서 자는 척만 했다. 아버지 앞에 밥상이 차려지면 잠에서 막 깨어나는 척 하면서 일어나 앉았다.

엄마는 못마땅한 눈길로 쏘아보지만, 이들은 아빠의 수저가 오르내릴 때마다 강아지처럼 올려보고 내려보곤 했다. 결국은 아버지로부터 한 두 점의 음식을 얻어먹긴 했지만 그 대가로 엄마한테는 여지없이 웬수 소리를 들으며 군밤을 맞았다. 이들에게 욕먹는 일과 군밤 맞는 일은 별 거 아니었다. 얻어먹는 것만 중요했다. 이들은 엄마의 푸념과 "웬수"같은 년들이란 말을 자장가 삼아 단잠 길에 들었다.

특히 서양란은 배짱이 좋았다. 그녀는 배가 출출할 때마다 다락 위에 올라가 미숫가루를 한입 가득 넣었다. 엄마가 들어오면 얼른 뛰어내려 도망을 쳤다. 어디 가느냐고 잡아 세우면 대답은 하지 못하고 유난히 반짝이는 눈으로 엄마 얼굴만 응시했다.

입에 넣은 미숫가루는 침에 빨리 녹지도 않고 그렇다고 뱉어낼 수도 없었다. 입에 가득 찬 가루는 가끔씩 목구멍으로 날아들었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숨이 막혀 고통스러워했다. 입을 벌릴 수 없는 처지에서 매를 맞으니, 소리내서 울 수도 없었다. 단지 눈에서 닭 똥 같은 눈물만 줄줄 흘렸다.

가끔씩 닭이 알을 낳으면 그것을 훔쳐다 연탄불에 삶았다. 그 때의 연탄불은 화력이 약해 계란 하나 삶는 데에도 한 시간은 걸렸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엄마가 들이닥쳤다.

그녀는 얼른 물을 버리고 익지 않은 계란을 수채 구멍에 깨버렸다. 방금 비워진 냄비에서 김이 모락모락 솟아올랐다. 그녀는 얼른 그 냄비 앞을 가로막고는 엄마의 눈치만 살폈다. 서양란에게, "훔쳐먹는 일"은 임기응변과 순간적인 기지를 개발시켜주는 가장 큰 훈련수단인 셈이었다.

하루는 두 동생을 데리고 이발소로 향했다. 엄마는 쌍둥이와 막내둥이의 이발료를 그녀에게 맡겼다. 이발소를 향하던 일행은 길거리에서 노름꾼을 만났다. 노름꾼이 컵과 주사위를 가지고 어수룩한 사람들을 상대로 게임을 하고 있었다.

호기심 많은 서양란은 이를 한참동안 구경했다. 서양란에게 자신이 생겼다. 자기 같으면 돈을 좀 따겠는데 바보 같은 아저씨들이 돈을 잃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자기의 이발 요금을 내놓고 게임을 했다. 분명히 이 컵 속에 들어있어야 할 주사위가 저 컵에서 나왔다.

그녀는 열이 나서 동생들의 이발료까지 다 털어 넣었다. 모두를 잃고 나니 눈앞이 캄캄해졌다. 갑자기 엄마의 무서운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는 창피하다는 사실도 잊어버리고 소리를 내서 울어버렸다. 주위 사람들에게 민망했던지 그 노름꾼은 그녀에게서 땄던 돈을 집어던지고는 빨리 없어져 버리라고 소리쳤다.

하루는 서양란이 엄마 지갑에서 지폐를 훔쳤다. 사탕을 많이 사먹었지만 거스름돈이 많았다. 치마라 해봐야 검정 무명 천 조각에 X자 멜빵을 꿰매 달은 것이었다. 주머니가 없다보니 그녀는 동전을 양손에 가득 쥐고 왔다. 엄마의 모습을 보자마자 급한 김에 그녀는 동전을 고무신 바닥에 넣었다. 넣을 때까지는 좋았는데 걸을 수가 없었다. 갑자기 거동이 불편해진 모습을 보고 엄마는 지지리도 못난 짓은 골고루 해댄다며 소리를 질렀다.

"아, 빨리 오지 못햇?"

몸은 앞으로 나가고 발은 뗄 수가 없어 기우뚱거리다가 드디어 신발 속에서 튀어나와 엎어져 버렸다. 입술이 터져 피가 흘렀다. 치료는 고사하고 매타작만 당했다. 대략 이런 것들이 그 불쌍한 서양란의 어린 시절이었다. 엄마의 옛날 이야기를 듣고 있던 민경이는 까르르 까르르 웃으면서 엄마의 추억담을 더욱 재촉했다.

"엄마 나이 열 다섯 살, 중학교 2학년 때였단다. 외할머니는 대학생들을 상대로 하숙을 쳤단다. 어느 날 고학식이라는 스무 네 살 난 대학생이 엄마 집을 찾아 들었단다. 엄마는 그 청년을 보자마자 반해 버렸단다. 호수같이 깊고 큰 눈을 가진 남자였단다. 시간이 갈수록 그 청년을 단 하루라도 안보면 못 견뎌 했단다.

나는 매일 아침 그 사람의 방에 들려 그 사람의 얼굴을 보아야만 학교에 갈 수 있었단다. 학교에서 돌아와도 마찬가지였단다. 그러던 어느 날,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일이 발생했단다. 내가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그 사람이 없어졌단다.

엄마는 그 사람이 쓰던 물건들을 이리 저리 만져보면서 울고 또 울었단다. 한동안 밥도 못 먹고 가슴을 앓았단다. 지금도 어쩌다 꿈에 그 사람을 보곤 한단다. 꿈에서 깨어나면 그렇게 서운할 수가 없단다. 죽기 전에 꼭 한 번 얼굴이라도 봤으면. . . . ."

민경이의 마음도 안타까웠다. 한동안의 침묵이 흘렀다.

"엄만 그 때에도 꽤 조숙했었나봐"

"넌 좋아해 본 남학생이 없었니?"

"아니, 없었어"

"엄마의 처녀 시절은 오직 그 남자를 그리워하는 시간이었단다. 엄마가 스물 네 살 되던 해, 외할머니는 중매쟁이를 놓아 어느 대기업에 다니는 스물 아홉 살 난 청년과 결혼을 시켰단다. 바로 네 아버지란다. 세월이 많이 흘렀고 어느 듯 고학식에 대한 그리움도 세월의 바람 속에 희석이 되더구나.

그래서 엄마에겐 차츰 아버지에 대한 꿈이 생기더구나. 그러나 네 아빠는 엄마의 꿈을 소화해줄 만큼 분위기 있는 남자가 아니었단다. 어쩌다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커피를 타오면 아빠는 자기 커피 잔만 가지고 가서 TV를 켜곤 했단다.

때로는 동네 호프집에라도 가자고 하면 네 아빠는 뭘 그런 데를 가느냐며 귀찮아했단다. 고기를 구어 먹어도 네 아빠는 자기만 먼저 부지런히 먹고 응접실로 나가더구나. 고기를 굽는 엄마에게 고기 한 점, 쌈 한 개 싸서 먹여주면 얼마나 좋았겠니? 고기 같은 건 아빠가 구울 수도 있지 않니? 여자가 원하는 건 바로 이런 작은 것들이란다. 그러나 이 작은 것들은 결코 작은 게 아니란다"

"그래, 엄마 말이 맞아. 내가 보기에도 아빤 참 정떨어지는 남자야. 지난 번 만 해도 그렇더라. 분명히 아빠가 인감도장을 엄마한테 주지 않았으면서도 주었다며 화를 내는 거야.

나중에 아빠 호주머니 속에서 나왔을 때에도 아빠는 엄마한테 사과 한마디 안 했잖아. 우리 아빤 정말 틀렸어. 분위기도 없고, 성질은 거칠고. 그런 아빠에게 말대꾸 한번 제대로 안하고 사는 걸 보면 엄만 참 대단해"

"그래서 엄마는 아빠에게 연연하지 않고, 석사 과정이라도 공부를 했단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엄마는 마음속으로나마 아빠로부터 독립할 수 있었단다. 아빠에게 바라는 게 많으면 나만 속상하고, 가정도 늘 시끄러웠을 꺼다. 그래서 여자도 이제는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단다. 우리 민경이 공부 열심히 할꺼지? 그치? "

그후 민경이는 집안의 공기가 썰렁할 대마다 엄마의 아픔을 동정해 왔다. 엄마의 비밀을 알고 있는 민경이는 쏜살같이 책방으로 달려갔다. 엄마 평생의 소원을 풀어주고도 싶었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엄마의 혼을 빼앗아간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기도 했다.

방송을 탄 책인지라 카운터에 쌓여있었다. 버스 안에서 저자의 사진부터 들여다보았다. 정말 엄마가 그토록 그리워했을 법한 얼굴이었다. 곱상한 얼굴에 날카로운 시선을 가진 상큼한 남자였다.

'어머! 우리 엄마가 이렇게 근사한 사람을! 이런 남자니까 엄마가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토록 못 잊어하지!'

순간 민경은 엄마와 아빠와의 원만하지 못한 부부관계를 떠올렸다. 그리고는 불쌍한 엄마가 왜 이런 남자와 결혼하지 못했는지 참으로 안타깝다는 생각까지 했다. 대문을 요란하게 닫고 들어선 민경이, 숨이 턱에까지 차 있었다.

잔뜩 긴장한 모습으로 책을 서서히 내밀면서 엄마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이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일 경우 그 기적의 순간을 맞는 엄마의 표정을 놓치지 않고 포착하려는 듯한 반짝이는 눈빛이었다.

서양란이 떨리는 손으로 급하게 책의 앞날개를 젖혔다. 그녀의 눈동자가 저자의 사진 위에 한동안 얼어붙었다.

"민경아! 맞다 맞아! 바로 이 사람이야! 세상에 이럴 수가!"

그녀의 입술이 간신히 움직이며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를 냈다. 그런 엄마를 바라보던 민경이의 얼굴도 한동안 얼어붙어 있었다.

"어머, 세상에, 이 사람! 얘, 민경아, 이 사람 좀 봐라"

민경이는 말이 딸이지 서양란에게는 친구나 다름없었다. 엄마에게 늘 반말을 하면서도 민경이는 엄마를 극진히 사랑했다.

"엄마, 그 사람 대단한가봐, 글에도 힘이 넘쳐 있던데?"

'그것 봐라!'

서양란은 순간 민경이에게 자랑스러움을 느꼈다. 그녀가 느끼는 벅찬 기쁨을 온 세상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 엄청난 비밀을 감히 누구에게 털어놓는단 말인가. 그래서 그녀의 기쁨을 알아주는 민경이가 그렇게 고마울 수 없었다.

그녀는 민경이 앞에서 저자의 사진을 뚫어지게 들여다봤다. 그러다가 쏜살같이 앨범집을 가져왔다. 다른 사진 뒤에 숨겨뒀던 색 바랜 사진 하나를 꺼냈다. 고학식이 열 여덟 살 때 찍은 명함판 독사진이었다.

"얘, 민경아, 이 사진하고 한 번 비교해봐라"

"엄마, 이 사람이랑 엄마랑 가끔 만나 차라도 한잔씩 하면 참 좋겠다. 엄마의 속타는 심정, 이 사람이라면 모두 들어줄 수 있을 꺼 아냐? 엄마에겐 그런 친구가 필요해. 돈만 있으면 뭘 해? 엄마 인생은 참 불쌍해. 엄마, 이 사람한테 전화할 자신 있어? 내가 대신 해줄까? 우리 엄마가 30년간이나 사랑해 왔다고?"

민경이가 조잘대는 동안 서양란의 영혼은 이미 어린 시절을 반추하고 있었다. 가슴속에 새겨진 고학식의 모습들이 마치 어제 보았던 활동사진처럼 생생하게 떠올랐다.

'우물가에서 말없이 미소짓던 그 얼굴! . . . . .'

그녀가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에 민경이는 목욕탕에 있었다.

"민경아, 여기에 적혀있는 연구소, 전화번호 좀 알아볼래? 그분이 연구소를 운영하나봐, 나는 도무지 떨려서 전화번호를 못 누르겠다"

월요일 아침 그녀는 평상시보다 빨리 그녀의 연구실에 나가 고학식이 소장으로 있는 K연구소에 전화를 걸었다.

"박사님, 미국 출장 가셨는데요, 닷새 후에나 오실 거예요" 사무실 여직원이 매우 친절했다.

일각이 여삼추였다.

'제발 그 동안에 아무 일도 없었으면! 요새는 항공기 사고도 많다던데!'
그녀는 평상시의 그녀답지 않게 엉뚱한 상상까지 해가면서 마음을 졸였다.

'제발 딱 한 번만이라도 그를 만나봤으면!'

그후 3일째 되는 날 그녀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K연구소에 전화를 했다. 그런데 이 웬 반가운 소식인가. 닷새 후에나 온다던 고학식이가 그날 온다는 것이 아닌가! 그녀는 떨리는 가슴을 달래가며 K연구소 여직원에게 그녀의 사무실 전화와 핸드폰 전화 번호를 모두 남겨 놓았다. 그후 몇 일이 지나도록 고학식에게서는 전화가 없었다.

'그가 나를 만나기 싫어하는 건 아닐까?. . . .'

초조해 하는 엄마의 모습을 바라보는 민경이의 마음도 안타까웠다.
"엄마, 출장에서 돌아와 바빠서 그럴 꺼야, 조금만 더 기다려봐, 엄마, 내가 그분에게 전화 넣어 볼까?"

그러던 어느 날 오후 네 시, 드디어 고학식에게서 전화가 왔다.

"혹시, 서양란씨이신가요? 저, 고학식입니다"

그녀의 몸이 갑자기 허공에 얼어붙었다.

"거, 거기 어디예요?"

"여기 명동 S호텔 커피숍입니다"

"어머, 세상에! 거기 그대로 계셔요, 제가 그리로 갈게요"

2001. 7.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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